'빛의 화가'가 동판에 새긴 '명품 판화'의 세계
네덜란드 거장의 판화 120점 전시
세밀한 표현 등 '내공' 돋보여
"웬만한 유화전보다 낫다" 호평
칼 안드레·윤석남 작품도 선보여
입장료 1000원으로 모두 관람
명작을 ‘명품’으로 만드는 핵심 요소 중 하나는 희소성이다.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는 아름다움, 그 ‘원본의 아우라’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부자들은 지갑을 연다. 같은 거장의 그림이라도 판화가 유화보다 훨씬 싼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똑같은 작품이 여럿 있으니 작가가 직접 품질을 검수하든, 친필 사인을 넣든 판화 한 개당 가격은 결국 ‘원화값÷작품 수’에 수렴한다.
예외는 있다. 웬만한 대가의 회화만큼 후한 대접을 받는 판화도 있다. 한 장에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을 호가하는 17세기 네덜란드의 미술 거장 렘브란트 판레인(1606~1669)의 판화가 그렇다. ‘야경’ 등 빛의 효과를 절묘하게 표현한 유화로 유명한 렘브란트는 판화 분야에서도 ‘역대 최고’로 꼽히는 작가다. 동판을 긁어내 찍어낸 그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섬세한 그의 작품들을 만나면, 왜 렘브란트의 이름 앞에 이런 수식어가 붙는지 알 수 있다.
사진처럼 사실적인 거장의 동판화
렘브란트의 실력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지금 대구행(行) 열차에 오르면 된다. 대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판화전 ‘렘브란트, 17세기의 사진가’에 그의 동판화 120여 점이 전시돼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진품으로 확인된 렘브란트의 동판화가 300종류 안팎인 걸 감안하면 3분의 1가량이 대구에 모인 셈이다. 네덜란드 렘브란트순회재단과 벨기에 판화 전문 미술관 뮤지엄 드리드의 전폭적인 협조 덕분이라는 설명이다.
전시장 초입에 있는 ‘자화상’ 섹션에는 렘브란트가 거울에 비친 자신을 수없이 그리고 새기며 여러 표현과 기법을 연구한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거리의 사람들’ 섹션에선 눈먼 바이올린 연주자, 거지 등 길 위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을 볼 수 있다. 이어 하이라이트인 종교화와 풍경, 인물·초상 등으로 이어진다. 흑백에 크기도 겨우 손바닥만 하지만 한눈에 봐도 간단치 않은 내공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작품 ‘얀 위텐보해르트, 저항파의 설교자’와 나란히 전시된, 렘브란트의 손길이 직접 닿은 동판 원판도 눈에 띈다. 이정희 대구미술관 학예연구사는 “현존하는 동판 원판은 전 세계를 통틀어 80개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세련된 전시 공간과 동판 제작 과정을 영상에 담는 등 섬세한 큐레이션은 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작품의 수량, 질, 전시 구성 모두 웬만한 명작 유화전보다 낫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 덕분에 전시는 개막 이후 매일같이 ‘오픈런’이 벌어질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내년 3월 17일까지 열린다.
칼 안드레·윤석남은 ‘덤’
대구미술관 중앙에 있는 전시 공간 ‘어미홀’에서도 거장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미국 미니멀리즘의 대가 중 한 명인 칼 안드레(88)가 주인공이다. 이번 전시는 그의 아시아 첫 개인전이다. ‘11번째 알루미늄 카디널’ 등 나무와 금속, 벽돌 등을 사용해 제작한 단순한 외향의 조각품과 함께 수동 타자기로 만들어낸 인쇄물 작품 ‘유카탄’ 등이 나와 있다.
다만 높이 18m, 너비 15m, 길이 50m에 달하는 거대한 전시장 크기 때문에 작품들의 빛이 다소 바랜다. 아담한 공간에서 집중적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면 더욱 빛이 날 만한 작품이 많다.
2, 3 전시실에는 국내 주요 미술상 중 하나인 이인성미술상 수상자전과 청년특별전이 함께 열리고 있다. 올해 수상자는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개척자’로 불리는 윤석남 작가(84).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 여성 독립운동가를 다룬 신작 채색초상화 20점이 특히 눈에 띈다. 전시는 모두 12월 31일까지 열린다.
대구미술관의 가장 큰 문제는 접근성이다. 시 외곽에 있는 데다 대중교통편도 많지 않아 서울은 물론 대구 시민조차 자주 찾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먼 길을 떠날 가치가 있는 전시들이다. 1000원짜리 한 장으로 이 모든 전시를 볼 수 있다.
대구=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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