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금리 피로가 누적된 ‘이곳’

조계완 2023. 11. 7.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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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열린 제21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주부, 회사원, 소상공인 등 참석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한겨레 프리즘] 조계완 | 정책금융팀장

20세기 고전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물질문명과 자본주의’(페르낭 브로델·1979년)에 따르면 인간사회의 경제는 삼각형 모습을 한 3개 영역으로 나뉜다. 맨 아래는 자급자족·물물교환 경제인 물질문명, 중간에는 자본·노동의 표준적 고용계약에 의한 생산과 소비가 일어나는 광범한 시장경제, 그리고 맨 위에는 독과점과 지대추구적 약탈 및 중심-주변 종속 구조에 기반한 ‘낯선’ 자본주의 영역이 자리잡고 있다. 이 책은 15~18세기 유럽 경제사를 다루지만, 지구상 어느 경제에서든 저 도식은 비록 세 층위의 크기가 제각각 다를 뿐 여전히 통용된다.

2925만명(2023년 8월 기준)이 경제활동을 하는 한국 경제는 자본주의 층위가 압도적으로 큰 소규모 개방경제다. 전통 제조업 및 신흥 정보기술(IT) 기업을 포함한 100여개 대규모기업집단, 혹은 대기업으로 분류되는 약 2천개 기업이 이 영역에 속할 것이다. 고용 비중은 작지만 생산·투자·수출을 주도하면서 경제성장률을 결정짓는 곳으로, 초과 이윤을 얻을 기회가 보이면 서비스·유통·금융·부동산업까지 어디로든 신속하고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가는 자본의 세상이다. 가장 강력하고 약삭빠른 자가 지배하는 이 세상은 ‘짧고 급하고 신경질적인 진동’을 보이는 영역이다.

하지만 경제인구 대다수의 일자리와 소득은 중소기업·소상공인·자영업자·농어민을 위시한 시장경제 영역에 분포한다. 이곳은 ‘수(數)의 무게’가 지배한다. 중복 집계를 무릅쓴다면 우리 경제에서 사업체는 법인 93만여개를 포함한 약 총 614만개, 중소기업은 약 771만개, 자영업자는 580만명으로 추산된다. 거대한 사회경제적 집단을 형성하며, 변화 속도는 완만한 리듬을 갖고 수요-공급에서는 정상적인 경쟁적 평균 이윤을 버는 곳이다.

우리가 통과해온 팬데믹 3년과 인플레이션 장기화, 통화긴축 가속화가 형성한 자기장 안쪽, 즉 ‘누적된 금리 피로감과 팍팍한 물가 압력’이 가장 넓고 깊게 들어서 있는 곳도 자본주의 층위가 아니라 시장경제 영역이다. 성장·물가·금리 경로가 한층 불확실해질 때 가계·기업은 적응적 행동을 하기보다는 경제·금융시스템의 무언가를 무너뜨리거나 큰 상처를 내고, 그 뒤에야 비로소 경제에 탄력적 복원력이 나타나곤 했던 역사적 경험이 있다. 부채 특성상 대출금리는 3%에서 4%로 상승할 때보다 4%에서 5%로 오를 때 그 충격은 더 크고, 정책금리가 더 오랫동안 동결되는 경우 인플레가 점차 수그러들수록 실질금리는 경제에 더욱 긴축적이고 제약적인 수준이 될 것이다. 물론 빚이 경제에 꼭 나쁜 것만은 아니어서 소비·생산·교육투자를 이끌어 더 많은 고용과 소득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관리·통제 거의 불능’ 상태로 팽창한 가계부채 약 2200조원(한국은행 자금순환통계 기준)은 필경 자영업자·소상공인 등 시장경제 영역에서 도화선으로 작용할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한국 경제의 생산함수는 구조적 변동을 겪고 있다. 근래 약 20개월째 2%대(계절요인 조정)에 머무는 ‘완전고용’ 수준의 실업률 수치는 양호하지만, 생산함수를 구성하는 자본·노동·기술에 진행 중인 저출산, 낮은 생산성, 노후소득빈곤, 플랫폼경제(배달·택배·청소업 등) 같은 ‘조용하고 근본적인 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성장과 소득불평등 대압착 시대는 오래전에 지나갔고, 이제 정체와 대분기(양극화·분절화)가 시장경제에서 활동하는 대다수 경제인구에게 열패감을 안기는 중이다.

브로델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는 시련이 있을 때마다 드러내는 유연성과 변형, 쇠퇴와 복귀 능력을 통해 ‘장기 지속’하면서도 그 자신의 운명을 수축 혹은 확장시킨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금리 장기화 시대에 시장경제 영역의 운명을 정부 경제팀의 “역동적 민간경제” 구호와 약속에만 맡겨놓을 수는 없다. 어떤 기술이든 그 자체보다는 우리의 사용과 선택이 관건이듯, 경제정책 과정에도 사회의 집단적 압력을 반영시켜야 한다.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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