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풍속화가 춤으로 살아났다…'엘리자베스 기덕'[강진아의 이 공연P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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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오니 이름조차 모르는 수많은 것들 투성이예요. 하지만 언젠가 알게 되겠죠."
거대한 두루마리 형상의 무대 위에 100년 전 이방인의 시선으로 그렸던 조선의 모습이 하나씩 꺼내어진다.
천으로 얼굴이 가려진 채 끌려가는 독립운동 사형수들의 처절한 몸부림 그리고 굿으로 영혼을 달래는 무당의 춤사위 등이 펼쳐진다.
그리고 춤이 만들어 낸 천둥과 폭풍 속에 다시 깨어난 그녀는 '키스'가 아닌 '기덕'으로 조선의 새 이름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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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강진아 기자 = "조선에 오니 이름조차 모르는 수많은 것들 투성이예요. 하지만 언젠가 알게 되겠죠."
무대는 하나의 화폭이다. 거대한 두루마리 형상의 무대 위에 100년 전 이방인의 시선으로 그렸던 조선의 모습이 하나씩 꺼내어진다.
푸른색 눈에 꼬불꼬불한 머리카락 그리고 이국적인 청록색의 긴 치마를 입은 한 여성. 흰 저고리를 입은 조선의 사람들은 그녀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관찰한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키스. 1919년부터 한국을 방문해 80여점의 한국 풍속화를 남기고 1921년 서양인 화가 최초로 서울에서 전시회를 연 영국인 화가다.
지난 5일 초연의 막을 내린 '엘리자베스 기덕'은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과 편지 내용을 바탕으로 한 서울시무용단 신작이다. 그녀가 남긴 그림 중 '시골 결혼잔치', '신부행차' 등 24점을 선정해 현대적 감각의 한국 춤으로 풀어냈다.
그림 속 인물들은 무대에서 그대로 살아난다. 멈춰있던 그림에 춤을 입혀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조선시대로 시간을 돌려 여행을 떠난다.
노동을 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는 여인들부터 갓을 쓰고 곰방대를 피며 장기를 두는 두 노인, 정월 초하루에 두 자녀를 데리고 나온 여인, 결혼 잔치로 분주한 시골 풍경까지 옛 시절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나라를 빼앗긴 삶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갔던 조선의 모습도 담아낸다. 시끌벅적한 잔치 속에 신랑 없이 슬픈 표정으로 홀로 앉아있는 신부는 애절한 몸짓을 보여준다. 천으로 얼굴이 가려진 채 끌려가는 독립운동 사형수들의 처절한 몸부림 그리고 굿으로 영혼을 달래는 무당의 춤사위 등이 펼쳐진다.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던 엘리자베스 키스도 극 후반부에 춤을 춘다. 금강산으로 향하며 만난 한 여인을 따라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듯 춤추며 구두를 벗고 훌훌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춤이 만들어 낸 천둥과 폭풍 속에 다시 깨어난 그녀는 '키스'가 아닌 '기덕'으로 조선의 새 이름을 얻는다.
이방인이 바라본 한국 풍경을 무대로 가져와 무용수들 몸짓으로 풀어낸 과정이 흥미롭다. 일상적이면서 아픔이 있는 시대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그림이 인상적이다.
각 장면의 개연성은 없지만, 풍경화처럼 자연스레 흘러간다. 극적인 사건이 없어도 시시각각 변하는 춤과 음악 그리고 영상이 시선을 잡아끈다. 무용수들의 자유롭고 힘찬 몸짓에 거문고, 아쟁, 가야금, 대금 등 국악적 요소를 띤 음악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흰색의 무명옷부터 색동옷, 혼례복, 무당옷 등 화려한 색감의 다채로운 한복 의상도 볼거리다. 다만 같은 구조의 형태가 반복되며 뒷심이 약해지는 면도 있다.
'일무'로 호평받은 정혜진 서울시무용단 단장과 현대무용가 김성훈이 공동 안무로 참여했다. 경민선 작가가 극본을 맡았고 오경택 연출, 오필영 무대디자이너, 김일현 영상디자이너 등이 함께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akang@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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