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치료 중단한 8개월 희소병 아기에 ‘희망’ 발급한 이탈리아

조윤영 2023. 11. 7.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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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진 “연명치료 중단이 최선”…부모 항소 기각
이탈리아, 긴급 내각회의 열어 시민권 부여
멜로니 총리 “생명 지키기 위해 최선 다할 것”
이탈리아 정부가 이날 긴급 내각 회의를 열어 8개월 된 영국의 인디 그레고리가 이탈리아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이탈리아 시민권을 부여했다. AP 연합뉴스

연명치료 중단 위기에 처한 희소병을 앓는 영국 아기에게 이탈리아 정부가 시민권을 부여했다.

6일(현지시각) 로이터 통신은 이탈리아 정부가 이날 오후 긴급 내각 회의를 열어 8개월 된 영국의 인디 그레고리가 이탈리아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시민권을 부여했다고 보도했다.

지난 2월 태어난 그레고리는 희소병으로 알려진 미토콘드리아병을 앓고 있다. 미토콘드리아병은 세포의 에너지 대사를 조절하는 미토콘드리아가 세포에 충분한 에너지를 공급하지 못하는 질환이다. 그레고리는 태어나자마자 영국 노팅엄의 퀸스 메디컬센터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의료진은 9월 연명치료 중단을 권고했다. 생명유지장치가 그레고리의 생명을 짧게나마 연장할 수 있지만 그레고리에게 더 많은 고통을 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충격을 받은 그레고리 부모는 딸에게도 삶의 기회를 가질 자격이 있다며 계속 치료해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이들의 다툼은 법정으로 갔다.

영국 고등법원은 지난달 13일 의료진의 손을 들어줬다.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하는 것이 그레고리에게 “최선의 이익”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재판부는 “인디에 대한 가족의 헌신은 믿을 수 없을 정도였고 가족의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누구라도 인디에 대한 가족의 관심과 인디의 회복력, 용기, 인내심에 대한 가족의 믿음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도 “의학적 증거는 만장일치로 명확했다”고 밝혔다.

판결에 불복한 그레고리 부모는 항소했지만 영국 항소법원은 같은달 23일 기각했다. 그 뒤 유럽인권재판소에도 제소했지만 유럽인권재판소(ECHR)는 같은 달 26일 생명유지장치 중단을 금지하지 않을 것이며 영국 법원의 판결에 항소할 수 없다고 밝혔다고 비비시(BBC)는 전했다.

이탈리아 정부가 이날 긴급 내각 회의를 열어 8개월 된 영국의 인디 그레고리가 이탈리아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이탈리아 시민권을 부여했다. AP 연합뉴스

그러자 같은달 30일 교황청이 운영하는 이탈리아 로마의 아동전문병원인 제수 밤비노 병원이 그레고리의 치료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영국 고등법원은 지난 2일 아기를 로마로 이송해달라는 그레고리 부모의 요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설득력 있는 새로운 의학적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레고리의 예후가 이탈리아 병원의 치료로 바뀔 수 있다고 볼 만한 근거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레고리 부모가 다시 항소했지만 항소법원은 지난 4일 기각했다.

6일 오후 2시까지 그레고리의 생명유지장치 제거를 유예하는 법적 조처 만료를 앞두고 이탈리아 정부가 움직였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이날 오후 긴급 내각 회의를 열었다. 불과 몇분 만에 그레고리에게 이탈리아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날 내각 회의의 유일한 안건이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내각 회의 뒤 성명에서 그레고리의 치료 비용을 정부가 전액 부담하겠다고도 밝혔다.

멜로니 총리는 엑스(X·옛 트위터)에 “그들은 어린 인디에게 희망이 별로 없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아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인디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려는 부모의 권리를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갈레아초 비냐미 인프라부 차관은 로이터 통신에 “이탈리아 정부의 조처로 인디가 제수 밤비노 병원으로 이송될 수 있을 것”이라며 “이 조처가 없었다면 인디의 생명유지장치가 꺼졌을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이탈리아 정부 관계자는 로이터 통신에 “인디 부모가 영국 주재 이탈리아 영사관에 아기를 이탈리아로 이송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지만 영국 정부가 승인할 의무는 없다”고 말했다.

그레고리 아버지는 국제 기독교 단체 크리스천 컨선에 “이탈리아 이송이 다소 위험하더라도 영국에서 제시한 유일한 대안은 인디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며 “우리에게도, 인디에게도 잃은 게 없다”고 말했다.

2018년 4월27일(현지시각) 연명치료 논쟁을 불러일으킨 23개월 된 영국의 알피 에번스가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한 지 닷새 만에 사망했다. AFP 연합뉴스

이번 일은 2018년 연명치료 논쟁을 불러일으킨 23개월 된 영국의 알피 에번스 사건과 유사하다.

당시에도 희소병으로 영국 리버풀의 한 병원에 입원했던 에번스의 부모는 연명치료 중단을 권고받고 법정 다툼을 벌였지만 패소했다.

그 뒤 제수 밤비노 병원이 연명치료 지원 의사를 밝히자 이탈리아 정부는 에번스에게 시민권을 발급해 에번스가 치료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그러나 영국 고등법원은 끝내 에번스에 대한 사법 관할권이 영국에 있다며 이송을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에번스는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한 지 닷새 만에 사망했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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