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성 공장장이 놀랄 일?” 세계 최대 화학사 ‘우먼파워’
여성 후배들 꿈 펼칠 기반 만들어져 기뻐
안전·품질 최우선...소통하는 일터 만들것
“회사 내에선 특별하다고 보지 않는 분위기인데 외부에선 많이들 놀라더라고요. 그래도 한국바스프에선 여성 공장장이 처음이니까 제 역할을 해내야 후배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가겠죠. 일하고 싶은 공장으로 만들 겁니다.”
지난달 26일 찾은 경기 안산시 한국바스프 안산공장.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을 만드는 공장은 부지가 1만3000㎡를 조금 넘는 정도로 작았지만 생산시설부터 연구소까지 빈틈없이 들어서 바스프의 주요 생산 거점이자 연구개발의 핵심 기지로 역할하고 있었다.
이날 만난 김희정 한국바스프 안산·예산 통합공장장에게도 작지만 강한 리더십이 느껴졌다. 바스프 기업 컬러 중 하나인 주황색 피케셔츠에 청바지 작업복을 입고 공장 곳곳을 누비는 모습에선 ‘현장에서 소통하는 리더가 되겠다’는 그의 포부가 느껴졌다.
김 공장장은 올해 2월 한국바스프 첫 여성 공장장으로 임명돼 안산과 충남 예산 공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제조업, 특히 석유화학업계에서의 여성 리더 임명은 극히 드문 일이지만 바스프그룹에서만큼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김 공장장은 “성별이나 연령과 관계없이 투명하고 고르게 기회가 주어지는 유연한 문화가 있다 보니 여성 엔지니어 비율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며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기회가 기뻤지만 사내에서는 이번 인사에 대해 놀라거나 하진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 올해로 창립 158년을 맞은 독일 기반의 세계 최대 화학기업 바스프는 다양성과 포용성을 핵심 가치로 보고 여성 인재 기용에 앞장서 왔다. 1918년 화학기업 최초로 여성 화학자를 고용했고 1964년 최초의 여성 임원을 발탁했다. 현재 글로벌 기준 여성 임원의 비율은 27.2%다. 지난해 한국 100대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이 5.6%라는 것과 비교하면 5배 가까이 높다.
1996년부터 석유화학업계에서만 27년째 일하고 있는 김 공장장은 최근 여성 후배가 늘어난 업계 분위기가 반갑다고 했다.
그는 “과거엔 석유화학업계에 종사하는 여성 인력이 워낙 적었고 그마저도 총무나 인사, 회계 같은 관리 분야에 집중돼 있었는데 요즘은 생산이나 연구개발, 안전 관련 여성 직원 비율이 굉장히 높다”면서 “후배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꿈을 펼칠 기반이 만들어져 기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더 큰 미래를 그리는 여성 후배를 위해 무거운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안산·예산 공장을 더 좋은 일터로 만들 계획이다. 김 공장장은 “현장에선 안전과 품질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기본으로 돌아가 조직과 시스템을 재정비하고 직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공장을 만들겠다”고 힘줘 말했다.
김 공장장의 안내로 둘러본 안산공장은 30년이 넘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잘 정돈돼 있었다. 이곳에선 크게 4개 제품군으로 나뉘는 100개 이상의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제품을 만든다. 가벼우면서도 단단하고 온도와 열에 강해 금속을 대체하는데 주로 자동차나 전기, 전자 부품 관련 소재로 쓰인다. 현대기아차, GM 등 글로벌 완성차업체가 한국바스프의 주고객이다.
생산 공정은 단순하다. 사일로(저장고)에 저장돼 있는 PBT(폴리부틸렌테레프탈레이드), POM(폴리아세탈) 등 네 가지 기본 원료에 각종 첨가제, 보강재 등을 넣어 고온 환경에서 충분히 섞어준 뒤 국수 가닥처럼 길게 뽑아내 냉각하고 잘게 잘라내면 된다. 어떤 원재료를 얼마큼의 비율로 혼합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소재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생산은 간단하지만 제품 출하되기까지 과정에는 중요한 게 남아있다. 바로 품질 검사다.
공장에선 일정 시간마다 샘플을 채취해 시편(시험 분석을 위한 조각)을 만든 뒤 제품 사양에 맞는지 확인하고 있다. 예컨대 강도와 점도는 적정한지, 녹는점 기준은 지켜졌는지, 보강재는 잘 분포돼 있는지 등을 확인하는 식이다.
최종 검사를 마친 완제품의 일부 샘플은 3년간 보관하게 돼 있다. 불량이 있을 때 추적하기 위한 조치다. 현장 관계자는 “주로 자동차에 많이 쓰이기 때문에 안전성을 까다롭게 보고 있다”면서도 “타이트한 내부 규정에 맞춰 출하하기 때문에 불량은 없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안산공장에는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이노베이션 센터가 함께 있다. 현재 구축 중인 아시아태평양지역 전자소재 R&D(연구개발) 센터까지 완성되면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생산·연구개발의 핵심 기지로서의 역할이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노베이션 센터에선 고객사 요청에 따라 새로운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을 개발한다. 개발자가 고객 요구사항에 맞게 합성 포뮬레이션(화학식), 즉 레시피를 고안하면 그에 맞춰 컴파운드를 소량 제작하고 각종 물리·화학 테스트를 진행해 제품화가 가능한지 확인하는 것이 주 업무다.
5층짜리 센터에는 컴파운드를 제작할 수 있는 ‘미니 공장’부터 사출실, 인장·마모·난연·내열·노화 등을 테스트할 수 있는 실험실까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시험기구만 100여개에 달했는데 장비값만 수십억원이라고 현장 관계자는 귀띔했다.
통상 1년에 100건 내외의 프로젝트를 수행하지만 모든 개발품이 상용화되는 것은 아니다. 개발에는 대부분 성공하지만 제품력과 가격을 두고 경쟁사와 겨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국바스프는 프로젝트의 20% 가량을 상용화하고 있어 타율이 좋은 편이다.
박세홍 연구소장은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신제품 개발에 대한 모든 기술적 지원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재활용 플라스틱 개발 요청이 많아 관련 제품 개발에도 노력하고 있다”며 “반도체 소재와 관련한 R&D 센터까지 들어서면 시너지가 클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한국바스프는 전기차 시장 확대 등으로 다양한 특성을 가진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만큼 관련 연구개발을 강화해 시장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방침이다. 특히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의 경우 탄소 절감 효과가 커 지속가능한 성장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국바스프 관계자는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을 포함한 광범위한 비즈니스 포트폴리오를 통해 자동차, 건설, 제약, 전자·전기, 농업 등 다양한 산업에 제품과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며 “바스프는 한국 시장에 대한 투자를 앞으로도 확대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바스프그룹의 지난해 한국 내 매출은 약 15억유로(2조1000억원)이다. 안산=김은희 기자
ehki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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