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때 수류탄에 몸 날려 부하들 살린 美 해병 소대장

김태훈 2023. 11. 7.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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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중공군과의 전투 도중 부하들을 살리고 장렬하게 전사한 미 해병대 소대장의 73주기 기일을 맞아 미 국방부가 홈페이지에 추도의 글을 게재했다.

이 소대장에겐 미국에서 군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영예에 해당하는 명예훈장(Medal of Honor)이 추서됐다.

미 해병대가 6·25전쟁을 통틀어 가장 처절했던 전투로 꼽히는 장진호 전투(1950년 11월26일∼12월13일)에 돌입하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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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국방부, '명예훈장' 수훈자 림 소위 사연 소개
중공군과 교전 도중 장렬히 전사… 73주기 맞아

6·25전쟁 당시 중공군과의 전투 도중 부하들을 살리고 장렬하게 전사한 미 해병대 소대장의 73주기 기일을 맞아 미 국방부가 홈페이지에 추도의 글을 게재했다. 이 소대장에겐 미국에서 군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영예에 해당하는 명예훈장(Medal of Honor)이 추서됐다.

6일(현지시간) 미 국방부에 따르면 로버트 데일 림(1925∼1950)은 펜실베이니아주(州) 랭커스터에서 태어났다. 고교 시절 럭비, 야구, 농구를 즐기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그가 고교를 졸업한 1943년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다. 미군은 유럽에서 나치 독일군, 태평양에서 제국주의 일본군과 각각 싸우는 중이었다.
6·25전쟁 참전용사 로버트 데일 림(1925∼1950) 미 해병대 소위. 부하들을 살리고 장렬히 전사한 뒤 명예훈장이 추서됐다. 미 국방부 홈페이지
원래 군인이 되고 싶었던 림은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고된 훈련을 마친 뒤 그는 전선 대신 메릴랜드주에 있는 미 해군사관학교로 보내졌다. 림의 뛰어난 자질을 알아본 해병대 측이 그를 해사에 입교시켜 장교로 키우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4년의 사관생도 과정을 마치고 1948년 해병 소위로 임관한 림은 이듬해 모교인 해사 교수의 딸과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일궜다.

1950년 여름 림이 속한 부대는 지중해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해 6월25일 한반도에서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유엔 결의에 따라 한국을 돕기로 한 미국은 태평양 일대의 부대를 정비하고 나섰다. 림은 상부의 명령을 받고 지중해를 떠나 한국으로 향했다. 해병1사단 7연대 3대대 소속 소대장이 된 림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 작전에 잇따라 투입됐다. 북한군과의 치열한 교전에서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시작한 후 림의 부대도 북한의 함경도 내륙으로 깊숙이 진출했다. 궁지에 몰린 북한으로부터 도움을 요청받은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개입했지만 미국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1950년 11월6일 림의 부대는 함경남도 장진호 동쪽 진흥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미 해병대가 6·25전쟁을 통틀어 가장 처절했던 전투로 꼽히는 장진호 전투(1950년 11월26일∼12월13일)에 돌입하기 직전이었다.

림의 부대는 매복해 있던 중공군의 습격을 받았다. 림에게 “소대를 이끌고 가서 산등성이의 적군을 쫓아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먼저 와서 진을 치고 있던 중공군은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단단히 무장한 상태였다. 림과 소대원들은 적군의 총탄과 수류탄이 빗발처럼 떨어지는 가운데 전진과 후퇴를 거듭했다.
6·25전쟁 참전용사 로버트 데일 림(1925∼1950) 미 해병대 소위의 묘비. 버지니아주 알링턴 국립묘지에 있다. 미 국방부 홈페이지
그때였다. 적군이 던진 수류탄이 림의 소대원들 사이에 떨어졌다. 림은 주저 없이 그 위로 자신의 몸을 던졌다.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25세 젊은이의 뜨거운 피가 늦가을 차가운 대지에 스며드는 동안 소대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용감하게 싸워 마침내 중공군을 몰아냈다. 이 전투는 미 해병대가 중공군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로 기록됐다.

림의 유해는 북한에 임시로 안장됐다가 고국으로 귀환했다. 고인의 안장식은 버지니아주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최고의 예우 속에 엄수됐다. 1년여 뒤인 1952년 미군은 고인에게 명예훈장을 추서했다.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는 남편 대신 훈장을 받은 부인은 이를 해사 박물관에 기증했다. 1970년대 고인의 고향 마을에 있는 도서관과 공원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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