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형에 스며든 지하 캠퍼스… 도심 속 대학 모범선례로 [스페이스도슨트 방승환의 건축진담]

2023. 11. 7. 10:02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2) 이화캠퍼스복합단지(ECC)
‘땅 재단하는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
지하공간 길이 252m 중앙계곡 설계
기존 전원적 풍경·상부공간 유지하며
도심 향해 열린 대학 이미지 만들어
지하캠퍼스, 캠퍼스 확장 공식 부상

‘대학’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는 니트 카디건을 어깨에 걸친 학생들이 몇 권의 책을 들고 ‘잔디 깔린 캠퍼스’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장면이다. 대학의 낭만과 여유를 상징하는 ‘잔디 깔린 캠퍼스’는 1800년대 미국에서 시작됐다. 구체적으로 프랑스 건축가 조제프 자크 라메(Joseph-Jacques Ramee)가 미국 스키넥터디(Schenectady)시에 설계한 유니온 칼리지(Union College) 캠퍼스를 종합적으로 계획된 대학 캠퍼스의 효시로 본다. 그 전까지는 중세 수도원이나 도시 내 몇 개의 건물을 대학이 사용하는 형태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볼로냐대학(University of Bologna)도 1088년에 설립된 후 볼로냐시 안에 있는 지식인이 머무는 집에 학생들이 찾아가 수업을 듣는 방식이었다.

우리나라에 근대화된 대학이 설립된 경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고려대학교와 같은 민족사학이고 둘째는 경성제국대학과 같은 일제 관학이다. 마지막은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와 같은 미국 선교사학이다. 각 주체가 지은 학교는 각기 다른 건축 양식을 띠었다. 그중 미국 선교사학이 지은 건물은 영국과 미국의 컨트리하우스(Country house)를 기본으로 각 시대에 유행하는 건축 양식이 혼합됐다. 그리고 캠퍼스는 미국의 대학 캠퍼스처럼 목가적인 전원풍경을 띤 잔디밭을 앞에 두고 몇 개의 건물이 클러스터(cluster)를 이루었다.

대표적으로 연세대에는 언더우드관을 중심으로 아펜젤러관과 스팀슨관이 동서로 배치돼 있고, 그 가운데에 사각형 안뜰이 조성돼 있다. 이화여대에는 본관인 파이퍼홀을 중심으로 토마스홀이 동쪽에, 케이스홀과 클라라홀이 서쪽에 있고 그 가운데에 운동장이 들어서 있었다.
이화캠퍼스복합단지(Ehwa Campus Complex)는 건물이 들어선 땅보다 더 넓은 영역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파급함으로써 도시 속 대학의 역할을 스스로 실험하고 있다. 그 실험은 이화여대가 있어야 하는 이대앞까지 복합될 때 의미가 완성될 수 있다.
서울에 인구가 늘고 지가가 상승하면서 도심 속에 있는 대학들은 캠퍼스를 쉽게 확장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상대적으로 확장이 수월한 지방으로 대학을 옮기는 일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결국 많은 대학들이 캠퍼스 내 오픈 스페이스를 없애고 건물을 새로 지었는데, 이때 첫 번째로 사라진 시설이 학교 운동장이었다.

이화여대도 비슷한 이유로 학교 운동장에 새로운 시설을 짓는 계획을 세웠다. 이화여대가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캠퍼스와 주변 도시조직, 일명 ‘이대앞’을 나누는 경의선을 지하화하는 사업이 추진됐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이대 앞에서 이화여대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경의선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당연히 대학의 정문이라는 인지도는 약했다.

2003년 10월, 이화여대는 국제지명현상설계를 개최했다. 당시 5개의 해외건축사무소를 지명했는데, 그중 당선작으로 선정된 도미니크 페로(Dominique Perrault)를 포함해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Zaha Hadid), 일본 요코하마 오산바시 국제여객터미널을 설계한 FOA가 작품을 제출했다. 그리고 2008년 이화캠퍼스복합단지(이하 ECC)가 준공됐다.

ECC를 설계한 도미니크 페로는 건물이 들어선 땅을 건물의 네 옆면과 지붕에 이어 여섯 번째 면(面)으로 간주할 만큼 땅에 대한 해석을 중시하는 건축가다. 그는 기존의 지형을 변형해 새로운 지형을 만들기보다는 기존 지형 속에 건축물을 채워 넣어 원래 있었던 풍경을 살리는 건축을 추구한다. 그래서 ‘땅을 재단하는 건축가’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는 ECC를 시작으로 여수의 예울마루를 설계하고 2017년에 영동대로 복합환승센터 설계자로 선정되면서 ‘지하공간 설계의 일인자’가 되었다.

페로의 ECC 디자인은 과감했다. 그는 과거 운동장이 있었던 땅을 마치 홍해 바다 가르듯 양쪽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지하 4층까지 내려가는 쭉 뻗은 길을 만들었다. 페로는 폭 25m에 길이 252m의 이 길이 1년 내내 다양한 행위가 일어나는 활기찬 생활공간이 될 것으로 보고 ‘스포츠 스트립(The Sports Strip)’이라고 불렀다.
ECC는 다른 대학들에게 캠퍼스를 확장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그동안 대학들은 캠퍼스의 오픈 스페이스를 없애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을 짓는 방식으로 필요한 시설을 확보해 왔다. 특히, 상징성을 갖는 대학의 건물은 크고 높은 방식으로 지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홍익대학교 정문관이다(동우건축 설계). 그런데 이런 방식은 강학 공간을 삭막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도시 밖에서 대학을 봤을 때 변하지 않는 고집 센 상아탑처럼 느껴지게 한다.

이에 반해 ECC는 지하공간에 들어섬으로써 그 상부의 오픈 스페이스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동시에 이화여대는 자신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1930년대 지어진 네 건물과 전원적인 풍경을 지킬 수 있었다. 더군다나 도시에서 이화여대를 바라봤을 때 첫인상을 결정하는 장면을 높은 건물이 아닌 개방된 풍경으로 만듦으로써 도시를 향해 열린 대학이라는 메시지를 도시 밖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ECC 이후 지하 캠퍼스는 도심에 있는 대학들의 공식이 되었다. 연세대는 2015년에 신촌캠퍼스의 중심 공간인 백양로를 지하화하는 ‘백양로 재창조 프로젝트’를 완공했고, 홍익대는 2029년까지 연면적 10만㎡의 지하 캠퍼스를 만드는 ‘뉴홍익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대학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는 포용적인 분위기를 지닌 지역에 지식을 원하는 자들이 모여들어야 했다. 그래서 대학은 특정한 연고가 없는 인재를 일단의 지역으로 끌어들이는 요인 중 하나다. 대학에 입학한 인재들은 지식을 창출하고 지역의 성장에 보탬이 된다. 그런데 대학의 지식이 지역 속에서 확장되고 확장된 지식이 또 다른 지식인들을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대학과 지역 간의 상호적인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도시의 입장에서 보면 대학 주변은 젊은 흐름에 민감하고 문화적 소양을 갖춘 소비자를 상대하는 상권, 일명 ‘힙 타운(hip town)’이 형성될 수 있는 지역이다. 과거 이대앞이 대표적이었다. 새로운 업종을 시도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그 성공 여부를 가늠해 보기 위해 이대앞에 상점을 냈다. 스타벅스뿐만 아니라 미스터피자, 미샤 등이 이대앞에 1호점을 냈었다.

캠퍼스와 건축물의 디자인이 대학과 주변 지역과의 관계를 전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ECC는 1930년대 지어진 옛 건물의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지형이 됨으로써 대학 구성원과 도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동시에 건물이 들어선 땅보다 더 넓은 영역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파급함으로써 도시 속 대학의 역할을 스스로 실험하고 있다. 그 실험은 과거보다 많이 쇠락했고 회복은 더디지만 그럼에도 이화여대가 있어야 하는 이대앞까지 복합될 때 의미가 완성될 수 있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