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경력 스스로 돌아봐" '소년들' 정지영 감독, 여전히 소년의 열정이 보인다 [TEN인터뷰]
[텐아시아=이하늘 기자]
잊지 말아야 할 사건들을 발굴해 다시금 자신의 시선으로 재가공하는 정지영은 데뷔 40주년의 연차만큼이나 무게감이 느껴지는 감독이다. 영화 '블랙머니'(2019), '남영동 1985'(2012), '부러진 화살'(2012) 등 어둡고 처절한 삶의 단면을 다루지만, 정지영 감독에게는 왠지 모를 '소년다움'이 감돈다. 그 이유는 끊임없이 영화의 소재나 아이템을 찾아 눈빛을 반짝이는 그의 태도에 있다.
실제 사건인 삼례 나라슈퍼 실화를 다룬 '소년들'에서도 정지영 감독의 철학이 엿보인다. 소년들이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소리칠 순간을 위해 뚜벅뚜벅 한 발자국씩 걸어가는 과정을 담았던 것이다. 노장 정지영 감독의 작품에 새겨진 반짝거림은 언제나 아름답다.
'소년들'은 지방 소읍의 한 슈퍼에서 발생한 강도치사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소년들과 사건의 재수사에 나선 형사,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사건 실화극. 연출을 맡은 정지영 감독은 데뷔 40주년을 맞은 거장으로 영화 '부러진 화살', '남부군', '하얀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등으로 우리 사회의 이면을 들여보는 감독이다.
영화 '블랙머니' 이후, 4년 만에 '소년들'로 돌아온 정지영 감독은 "진작 개봉했어야 하는 영화다. 개봉을 기다렸다. 한국 영화가 잘 안되는 상황이지 않나. 만든 사람은 빨리 심판받고 싶다. 관객들은 언제 찍었는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느낌으로 안다. 아직은 싱싱할 때라서 다행이다"라고 강조했다.
삼례 나라슈퍼 사건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소년들'을 기획하게 된 계기에 대해 정지영 감독은 "약촌오거리 사건을 접했을 때, 평범한 소시민과 공권력의 관계를 발견했다. 그 문제를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마침 다른 사람이 한다고 해서 포기를 했다. 이 사건을 접하고 영화화를 결심했다"라고 설명했다.
실제 사건의 피해자가 있기에 영화화가 되는 것을 따로 어려움이 있었을 수도 있었지만, 정지영 감독은 "박준영 변호사가 미리 이야기를 해주셨다. 흔쾌히 동의를 해주셨다. 어제 전주 시사를 했는데, 소년 중 한 사람이 꽃다발을 하나 주더라. 감동했다"라고 이야기했다.
'소년들'의 본래 제목은 '고발'로 직관적이고 강렬한 느낌을 풍겼다. 정지영 감독은 '소년들'로 제목을 바꾼 이유에 대해 "'고발'은 가제였다. 공권력에 대한 고발이기에 그런 제목으로 했었다.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가 '소년들'의 소외당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힘 있는 자들이 어떤 식으로 접근하나.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도 그들을 무시하거나 관심 없어 하지 않나. 그런 문제가 이 영화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답했다.
이야기의 중심을 이끄는 캐릭터 황준철 역의 설경구는 독보적인 아우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시나리오 집필 과정에서부터 설경구의 캐스팅을 생각했다는 정지영 감독은 "쓰면서 설경구 배우를 생각했다. (설경구의 스케줄이 안 되어도) 기다리려고 했다. 옛날부터 하고 싶었다. '박하사탕'을 할 때, 촬영 현장을 갔던 적이 있다. 이창동 감독이 소개하는데, 이 신인 배우가 반가워하지도 않고 '너 감독이냐' 그런 것도 없다. '뭐 저런 놈이 있나'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이창동 감독한테 물어봤더니, 그 캐릭터 속에 빠져있기 때문이라고"라고 캐스팅 이유와 비하인드를 전했다.
황반장은 실제 삼례 나라슈퍼 사건에는 없는 인물로 약촌오거리 사건의 황상만 형사를 끌어왔다. 정지영 감독은 "약촌오거리 사건에서 황반장을 파악했다. 캐릭터를 만나고 황반장을 만나봤더니 그런 사람이더라. 자신이 뭔가를 해서 폼이 나고 싶은 인물이다. 그 상황을 녹여봤다. 약촌오거리 당시의 상황을. 처음에는 미친개이지 않나. 좌절하니까 무너진다. 그 속에 있는 황반장의 본질이 안 없어지는 바람에 다시 하는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사건의 긴장감을 불어넣는 검사 역에는 조진웅 배우가 출연한다. 전작 '블랙머니'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던 조진웅에 대해 정지영 감독은 "일단은 검사 역할이 작지 않나. 그런데 상당히 중요하다. 검사가 주는 긴장감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사한 캐스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진웅 배우한테 특별 출연 이야기를 했는데, 선뜻 허락을 해줬다"라고 고마움을 드러냈다.
현장에서 배우들에게 직접 다가가 디렉팅하는 연출 방식으로도 유명한 정지영 감독. 그는 "모니터를 보고 연기자가 연기를 했는데, 왜 마음에 안 나왔는지가 나올 때가 있다. 컷해놓고 가만히 앉아서 고민하면 사람들이 고민한다. 걸어가면서 생각이 떠오른다. 가서 그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다. 다른 현장에 가면 감독들이 거의 앉아있더라. 건강에 손해다"라고 웃음을 터뜨렸다.
1982년 영화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로 데뷔해 데뷔 40주년을 맞은 정지영 감독은 지금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며 후배들에게도 많은 귀감을 주는 연출자다. 데뷔 40주년을 맞아 기획전을 열기도 했던 정지영 감독은 쑥스러웠다며 소감을 언급했다. 정지영 감독은 "나는 그런 의미 부여를 잘 안 한다. 40주년 행사 자체도 쑥스럽다. 작년에 배창호 감독이 하는 바람에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을 계기로 영화 경력에 무엇을 했는지를 돌이켜보는 것에는 도움이 됐다. 평소에는 옛날 작품을 잘 생각 안 한다. 이번에는 좀 돌아보게 됐다"라고 말했다.
정지영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유독 배우 안성기와 호흡을 맞춘 경우가 많다. '남부군'(1990), '하얀 전쟁'(1992), '부러진 화살'(2012) 등에서 묵직한 연기를 보여줬던 안성기는 최근 혈액암 투병으로 건강이 악화한 근황으로 팬들은 걱정하기도 했다. 정지영 감독은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 안성기 배우가 가만히 있을 때는 괜찮은데, 말하면서 어눌해지지 않나. 밖에 나와서는 활동하면 좋겠다. 그것이 익숙해져야 빨리 회복이 될 것 같다"라고 답했다.
데뷔 이래 지금까지 꾸준히 영화를 만들면서, 사회를 향한 날 선 시선으로 감을 잃지 않은 비결은 뭘까. 정지영 감독은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나랑 같이 활동했던 80~90년대에 활동했던 사람 중에 좋은 감독들이 많은데 영화를 못 하고 있다. 영화 환경이 변하면서 적응이 못한 것이 아니라 환경이 안 받아주는 것이다. 나도 '부러진 화살' 때문에 재기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대한민국 영화계가 노하우가 쌓인 보석들을 땅에 묻힌 채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라고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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