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거장 랄프 깁슨 “저에게 만족하려 70여년 찍었다”

노형석 2023. 11. 7.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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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랄프깁슨 사진미술관’서 개인전
관객을 위해 자신의 작품이 들어간 내년도 달력에 서명하고 있는 랄프 깁슨. 지난 3일 부산 해운대 랄프깁슨사진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세번째 개인전 개막식 현장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마친 뒤 찍은 사진이다. 노형석 기자

“나는 메시지가 없는 아티스트입니다.”

사진을 찍는 작가들을 우리는 흔히 충실한 현상의 기록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 출신의 초현실주의 사진 거장인 랄프 깁슨(84)은 생각이 전혀 달랐다. 지난 3일 그의 이름을 딴 부산 해운대 랄프깁슨 사진미술관에서 만난 그는 기자에게 대뜸 되물었다.

“당신은 소통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죠. 하지만, 나는 소통하는 사람이 아니라 저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서 지난 70여년간 사진을 찍어왔습니다. 메시지를 발산하고 싶으면 전보를 치면 된다고 헐리우드 엠지엠(MGM)의 연출가 새뮤얼 골드윈이 말한 바 있지요. 아, 그리고 또 하나 제 인생에서 사진과 함께 해온 음악이 있군요.”

미소를 지으며 취재진 앞에 선 랄프 깁슨. 지난 3일 부산 해운대 랄프깁슨사진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세번째 개인전 개막식 현장이다. 노형석 기자

누드 도시풍경 정물 등에서 새로운 시선으로 발견한 초현실적 추상 이미지의 세계를 드러내며 1970년대 이후 세계 사진계에서 헬무트 뉴튼과 더불어 감각파 사진의 거장으로 군림해온 거장 랄프 깁슨과의 전시장 대화는 인터뷰라기보다는 곱씹는 맛이 색다른 대화의 느낌이었다. 거장은 세번째인 자신의 한국 개인전 개막 현장에서 최근 수년간 찍은 근작들뿐 아니라 기묘하면서도 환상적인 전자음악의 세계도 펼쳐 보였다. ‘클라인’이란 애칭으로 부르며 애장해 온, 끝부분 렉이 사라지고 없는 특이한 모양의 낡은 전자기타를 도인처럼 20여분간 연주했다. 그의 옆으로 잔잔한 물살이 흘러가는 영상이 나왔고 뒤쪽 배경으로는 누드와 건축물 사진이 함께 붙어있었다. 한국 서울의 동대문 디디피의 외관을 찍은 것이 분명한 곡선형의 건축물 윤곽선과 누드의 실루엣이 긴장감 어린 대비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1950~1960년대 로버트 프랭크와 도로시아 랭 등 세계 사진사를 움직인 다큐 사진의 거장들의 조수이자 협업자로서 함께 작업을 진행했던 그의 날카로운 눈썰미가 전시장 곳곳에서 빛났다. 사람의 모자, 의상 등의 복식과 신호등, 도로, 식물의 가지까지 현실과 현상의 생생한 이미지들을 날서고 낯선 초현실의 도상으로 재생시키는 절묘한 작업 70여점이 1, 2층의 공간 곳곳을 채웠다.

“예술이라는 것은 진행되는 프로세스(과정)입니다. 이번 전시만 해도 1972년 제가 찍은 초현실적인 인물과 풍경 연작인 몽유병자 여연작들이 지하 전시장에 있고, 1, 2층엔 2015년 이후 찍은 건축과 사물, 사람들의 작품들이 있습니다. 저는 같은 사람이지만 1970년대의 저와 2000년대 이후의 저는 다르지요. 예술을 통해 제가 그런 것을 좀 더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전시로 보여주려한 겁니다.”

지난 3일 부산 해운대 랄프깁슨사진미술관에서 개막한 깁슨의 세번째 한국 개인전 ‘정치적 추상’의 출품작 중 일부. 지난 2015년 이후 일상 사물, 풍경, 사람의 일부 이미지들을 컬러·흑백 화면으로 서로 대비시킨 ‘딥틱’ 스타일의 구성이 특징적이다. 노형석 기자
지난 3일 부산 해운대 랄프깁슨사진미술관에서 개막한 깁슨의 세번째 한국 개인전 ‘정치적 추상’의 출품작들 중 일부. 지난 2015년 이후 일상 사물, 풍경, 사람의 일부 이미지들을 컬러·흑백 화면으로 서로 대비시킨 ‘딥틱’ 스타일의 구성이 특징적이다. 노형석 기자

깁슨은 지난달 말 내한해 부산 고운사진미술관이 지난해 만든 랄프 깁슨 뮤지엄의 개인초대전 ‘정치적 추상’(내년 4월30일까지)의 준비 과정을 내내 살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청년 사진가 공모전인 ‘제1회 랄프 깁슨 어워드’의 최종 후보자 심사도 직접 대상자들을 만나고 작품 포트폴리오를 일일이 살필 만큼 공을 들였다. 수상자로 권도연 사진작가와 정희승 사진작가를 선정하고 1, 2회 전시를 내년까지 진행하도록 한 건 “놀라울 정도로 두 작가의 작품성이 뛰어나 한 사람을 고를 수 없었다”는 그의 강한 의지가 작용했다.

지난 3일 부산 해운대 랄프깁슨사진미술관에서 개막한 깁슨의 세번째 한국 개인전 ‘정치적 추상’의 출품작들 중 일부. 지난 2015년 이후 일상 사물, 풍경, 사람의 일부 이미지들을 컬러·흑백 화면으로 서로 대비시킨 ‘딥틱’ 스타일의 구성이 특징적이다. 노형석 기자

“내 전시가 왜 정치적 추상이란 제목을 달았냐구요? 흥미로운 얘기로 답변을 전달하고 싶어요.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소설의 해체를 이야기하면서 한 작가의 책의 반만 저자이고 나머지 반은 독자라고 했어요. 저의 사진 또한 반만 저의 것이죠. 나머지는 수천수만의 관객들이 다 따로 해석하고 보는 겁니다. 고대 그리스 극장도 아치형 기둥 안쪽 무대에서는 무엇이든 다 해석할 수 있는 공간이었어요. 이번 전시 또한 제 작품을 해석의 무대에 내어놓고 마음껏 뜯어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그리스풍의 극장 같은 자리였으면 합니다.”

그는 7일까지 부산 해운대의 풍경을 뜯어보고 촬영작업을 하다가 9일 미국으로 돌아간다.

부산/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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