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04] 사전트의 백합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2023. 11. 7.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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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싱어 사전트, 카네이션, 릴리, 릴리, 로즈, 1885-6년, 캔버스에 유채, 174.0 × 153.7cm, 런던 테이트 브리튼 소장.

1885년 9월 어느 날, 화가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1856~1925)가 런던의 템스강에서 배를 타다 중국식 종이 등이 걸린 정원을 봤다. 늦여름 강변에 어둠이 내려앉기 직전, 검푸른 밤공기와 불빛의 노란 기운이 뒤섞인 광경이었을 것이다. 사전트는 이처럼 짙푸른 초목과 희고 고운 꽃이 어우러진 여름 정원에서 아이들이 종이 등을 들고 있는 풍경화를 그리기로 했다.

그는 9월부터 11월까지 저녁이면 꽃 핀 정원에 이젤을 두고 스케치를 했다. 그가 바라는 하늘색은 낮에서 밤이 되는 순간 단 몇 분이면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저녁에 색을 칠하고, 다음 날 아침이면 지웠다가 저녁이 오기를 기다려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니 꽃이 시들어 떨어졌다. 하는 수 없이 그 자리에 꽃화분을 내놨다 들여놨다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원래 모델은 정원 주인이자 동료 화가의 다섯 살 난 딸 캐서린 밀레트였다. 하지만 캐서린의 붉은 머리카락이 영 어울리지 않았다. 모델은 유명 삽화가였던 친구 프레더릭 바너드의 두 딸로 밝은 갈색 머리카락의 열한 살 돌리와 일곱 살 폴리로 교체됐다. 작품은 여름을 한번 더 보내고 1886년 10월에서야 완성됐다.

흰 드레스를 입은 돌리와 폴리가 무성한 수풀 사이, 키 큰 흰 백합과 분홍 장미 앞에 서서 노란 등불을 바라본다. 그림 속에는 하늘이 없지만 공기 중에 맴도는 보라색에 늦여름의 노을빛과 어스름이 섞여 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템스강 위에서 등불을 본 적이 없는데도, 마치 그 밤에 화가와 같은 공기를 마신 것 같다. 그림의 캔버스와 물감 속에 수도 없이 많은 여름밤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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