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덕의우리건축톺아보기] 현판에 담긴 함의

2023. 11. 7.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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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등 궁궐 현판은 무관이 써
추락한 왕실 권위 세우려 금도금
불 기운 막으려 숭례문 세로 글씨
건축물 이름뿐 아닌 숨은 뜻 담겨

지난달 15일 광화문 월대와 현판 복원 기념식이 있었다. 일제는 1926년 경복궁 안마당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완공한 후 그 앞에 있던 광화문을 철거하려다 여론이 나빠지자 동쪽 궁장으로 옮겼다. 조선총독부 청사 정면을 가리는 광화문이 눈엣가시였기 때문이다. 이때 광화문과 한몸인 월대가 사라졌고, 현판은 한국전쟁 때 광화문이 소실되면서 함께 불타고 말았다.

문화재청은 2010년 광화문 복원과 함께 새 현판을 만들어 내걸었는데, 곧바로 현판에 균열이 생기는 말썽이 있었다. 이러던 참에 추후 고증 결과 처음 복원했을 때의 흰 바탕에 검은 글씨가 아니라 검은 바탕에 금도금 글씨라는 것이 새롭게 밝혀져 현판을 다시 만들었다. 이를 위해 현판에 글씨를 양각으로 새긴 다음 그 위에 얇은 동판을 대 글씨 모양을 본떠 이를 금으로 도금해 못으로 현판 글씨 위에 고정했다. 금가루를 수은에 섞어 동판에 바른 다음 열을 가해 수은을 증발시켜 금을 도금하는 것을 ‘금아말감’이라 하는데, 경복궁 중건 당시 공사의 진행과 물자의 조달을 매일 기록한 ‘경복궁 영건일기’에 따르면, 광화문 현판에 금 40돈이 들었다고 했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현판은 보통 글을 새기는 판자와 이를 둘러싸는 테두리목으로 구성된다. 테두리목은 판자 주변을 경사지게 둘러싸서 현판이 꽃잎처럼 펼쳐져 보이도록 입체감을 준다. 테두리목에는 조각하고 단청해 현판이 돋보이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서양에서 그림을 액자에 넣어 전시할 때 액자의 테두리를 갖은 문양의 조각과 색상으로 장식하는 것과 유사하다.

현판은 목수 중 가구와 문 등 작고 세밀한 구조물을 다루는 소목장이 짜고 글씨는 별도로 각자장이 새긴다. 이번 광화문 현판 제작에는 금도금을 위해 도금공이 추가로 참여했다. 글씨를 새기는 판자는 보통 한판인 경우가 많으나 여의치 않을 때는 여러 장을 붙여 사용했다. 광화문 현판도 원래 아홉 장의 판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마도 경복궁을 중건한 고종 당시 큰 나무를 구하기 어려워 부득이 작은 판자를 여러 장 붙여 사용한 듯하다. ‘경복궁 영건일기’에서 큰 목재를 구하지 못해 애태우는 상황을 여러 번 발견할 수 있다.

나라에서 중요한 건축물을 세울 때 완공이 가까워지면 상량문을 지을 ‘제술관(製述官)’과 상량문과 현판의 글씨를 쓸 ‘서사관(書寫官)’을 임명했다. 문관 중에서 글씨 잘 쓰는 이를 서사관으로 임명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때로는 임금이나 세자가 직접 현판 글씨를 쓰기도 했다. 임금이 직접 쓸 경우 ‘어필(御筆)’, 세자가 쓰면 ‘예필(睿筆)’이라고 현판의 오른쪽 위에 작은 전서체를 별도로 새겨 표시했다. 광화문 현판은 무관인 훈련대장 임태영이 썼는데, 궁궐 문의 현판은 특별히 궁궐을 지키는 무관이 쓰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쪽의 건춘문, 서쪽의 영추문, 북쪽의 신무문 역시 모두 무관이 서사관으로 참여했다.

현판은 기본적으로 건축물의 이름이나 잠계(箴戒), 수칙(守則) 등을 새겨 걸기 위한 것이었다. 이 중 건축물의 이름을 나타내는 현판을 특별히 ‘편액(扁額)’이라 한다. 그러니 ‘광화문 현판’보다는 ‘광화문 편액’이 보다 적확한 말이다.

옛사람들은 현판을 부적으로도 여겼다. 현판은 보통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로로 쓰지만, 한양도성의 남대문인 숭례문 현판을 위에서 아래로 세로로 쓴 것은 숭례문의 남쪽에 있는 관악산의 불기운을 막기 위해서였다. 풍수에 따르면, 관악산은 불기운이 강한 산이다. 불은 불로서 맞불을 놓아야 막을 수 있다고 믿었기에 숭례문 현판 글씨를 맞불 놓는 모습으로 만들어 관악산의 불기운을 막으려 했다. ‘숭(崇)’ 자는 불이 타오르는 형상이고 ‘예(禮)’ 자는 오행설에 따르면 불을 뜻하므로 ‘崇禮’를 세로로 쓰면 불이 활활 타오르는 모양이 된다. 동대문은 원래 ‘흥인문(興仁門)’이었는데 동대문을 끼고 있는 낙산의 산세가 남쪽의 목멱산, 북쪽의 북악산, 서쪽의 인왕산에 비해 빈약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 ‘지(之)’ 자를 넣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고쳤다. 또 도참설에 따라 현판의 이름을 고치기도 했다. 덕수궁의 정문은 본래 ‘대안문(大安門)’이었는데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야 국운이 오래간다는 도참설에 따라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그러나 세로로 쓴 숭례문 현판의 위력이 다했는지 2008년 숭례문이 화재를 입었고, 대한문이라 고쳤지만 조선은 곧바로 망하고 말았다.

현판은 집임자가 풍류를 즐기는 방편이기도 해, 곧잘 원하는 공간에 자기 취향을 드러내는 현판을 걸기도 했다. 헌종의 거처였던 창덕궁 낙선재에는 ‘보소당(寶蘇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옛 글씨와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헌종이 소동파(蘇東坡)를 흠모했기에 ‘소동파를 보배롭게 생각하는 집’이란 현판까지 건 것이다. 창덕궁 후원, 온돌방과 누각(樓閣)을 갖춘 정자 천석정(千石亭) 누각에는 ‘제월광풍관(霽月光風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여기서 ‘제월광풍’은 ‘비가 갠 뒤의 밝은 달과 맑게 부는 바람’을 뜻하고 ‘관(觀)’은 누각을 이르니 ‘제월광풍관’은 ‘제월광풍’의 풍류를 즐기는 누각을 일컫는다.

이처럼 건축물에 거는 현판은 건축물의 명칭을 나타내는 동시에 여러 함의가 내포되기도 했다. 조선의 으뜸 궁궐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현판 글씨를 금도금한 것에서 추락한 왕실의 권위를 되살리고자 했던 흥선대원군의 의지를 짐작할 수 있다. 창덕궁 주합루와 영화당 등 임금이 쓴 현판에 금도금을 하거나 금박을 입힌 경우는 있지만, 창덕궁과 창경궁 등 나머지 궁궐 정문 어디에도 금도금이나 금박으로 글씨를 입힌 경우는 없었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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