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머니’ 축구 이어 야구까지… 중동-인도 넘보는 야구[인사이드&인사이트]

황규인 스포츠부 기자 2023. 11. 6.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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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크리켓의 시장 쟁탈전
“크리켓 팬은 야구 사랑할 수 있다”… 오일머니 등에 업은 MLB 전설들
선수 영입 작전 수행도 레전드급… 미국에도 이미 프로 크리켓 출범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 성과까지… “시장 진입 속도 축구 때보다 빨라”
유니폼을 들고 기념 촬영 중인 베이스볼 유나이티드 이사진과 아랍에미리트(UAE) 정부 관계자들. 왼쪽부터 아드리안 벨트레, 존 미드리히 이사, 캐시 셰이크 최고경영자(CEO), 나하얀 빈 무바라크 알 나하얀 UAE 관용공존부 장관, 닉 스위셔, 펠릭스 로드리게스 이사, 타예브 카말리 UAE 국무부 국장. 사진 출처 셰이크 CEO 인스타그램
황규인 스포츠부 기자
‘사막에 가서 난로를 팔았다.’ 한국을 수출 강국으로 이끈 ‘상사맨’ 활약을 묘사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실제로 삼성물산은 1970년대 리비아에 2000만 달러어치가 넘는 난로를 팔았다. 얼핏 생각하면 그 더운 나라에 난로가 왜 필요할까 싶다. 그러나 사막은 낮에는 무덥지만 밤에는 체감온도가 영하로 떨어진다. 당시 리비아는 ‘오일머니’가 차고 넘치는 나라였기 때문에 구매력도 충분했다.

‘베이스볼 유나이티드(BU·Baseball United)’를 이끌고 있는 캐시 셰이크 최고경영자(CEO·44)도 ‘상사맨 마인드’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BU는 중동과 남아시아를 타깃 시장으로 삼고 있는 프로야구 리그다. 인도 출신 아버지와 파키스탄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미국 이민 2세로 태어난 셰이크 CEO는 “중동과 남아시아에는 크리켓 팬이 10억 명도 넘는다”면서 “공과 방망이로 하는 크리켓 팬이라면 역시 공과 방망이로 하는 야구 팬도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오일머니로 무장한 아랍에미리트(UAE)가 이 아이디어에 지갑을 열었다.》

● UAE가 야구에 투자하는 이유

UAE는 ‘석유 이후’에 대비하려 종합격투기(MMA), 포뮬러원(F1) 등을 통해 스포츠 세계 영향력을 키워 가고 있다. 그러나 축구를 사우디아라비아에 빼앗긴 뒤로 ‘단체 구기 종목’에서는 돌파구를 찾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셰이크 CEO는 “이 지역에는 MMA나 F1 팬보다 크리켓 팬이 훨씬 더 많다. 10억 명을 야구와 사랑에 빠지게 만들겠다”면서 UAE 7개 토후국 중 넘버 1, 2인 아부다비와 두바이 왕실에 투자를 권했다.

UAE가 P&G 마케터 출신인 셰이크 CEO를 보고 야구 사업에 투자한 건 아니다. 뉴욕 양키스 마무리 투수였던 마리아노 리베라(54·파나마), 1995년 내셔널리그(NL) 최우수선수(MVP) 배리 라킨(59·미국), 한국에서 ‘박찬호 도우미’로 유명한 아드리안 벨트레(44·도미니카공화국), 2010년 아메리칸리그(AL) 사이영상 수상자 ‘킹’ 펠릭스 에르난데스(37·베네수엘라) 등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 한 획을 그은 선수들이 BU 이사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투자 유치에 성공한 뒤 셰이크 CEO는 ‘크리켓 본거지’ 인도로 날아갔다. BU는 올해 5월 15일 “뭄바이 코브라스가 BU 1호 프랜차이즈가 됐다”고 발표했다. 뭄바이는 프로 크리켓 리그인 인도 프리미어리그(IPL) 최다 우승 공동 1위(5회) 팀 ‘인디언스’가 둥지를 틀고 있는 도시다. BU는 보름 뒤에는 파키스탄 최대 도시 카라치를 연고지로 삼는 모나크스(monarchs) 창단 소식을 전했다. 이에 대해 ‘카라치를 대표하는 크리켓 팀 이름이 킹스(kings)라서 모나크스(군주)를 선택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셰이크 CEO는 “인도와 파키스탄은 크리켓에서 전통의 라이벌 관계다. 야구에서도 MLB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를 뛰어넘는 라이벌 관계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UAE에 아부다비 팰컨스와 두바이 울브스가 창단하면서 BU는 4개 팀 체제를 갖췄다. 앞으로 구단 수를 8개까지 늘린다는 계획이다.

BU는 이미 원년 참가 선수 드래프트까지 마쳤다. 뉴욕 양키스 주전 유격수 출신 디디 호레호리위스(33·두바이), 2012년 월드시리즈 MVP 파블로 산도발(37·아부다비), MLB 통산 2639안타를 자랑하는 로빈슨 카노(41·두바이), 2005년 AL 사이영상 수상자 바르톨로 콜론(50·카라치) 등이 이 드래프트에서 뽑혔다. 한국 프로야구 LG에서 뛰었던 데이비드 허프(39·카라치)와 한화 출신 윌린 로사리오(34·두바이)도 지명을 받았다. 현재 BU에는 총 80명이 선수 등록을 마쳤으며 이 중 36명(45%)이 MLB 출전 경험이 있다. 4개 구단 단장과 감독 이력을 합치면 월드시리즈 우승 4회, 올스타 선정 32회가 나온다.

야구 선수 국제 이적 시장에 밝은 관계자는 “아직 BU 선수가 연봉을 얼마나 받는지 공개된 게 없다. 그래도 일본 프로야구에서 기회를 잡지 못한 외국인 선수들이 ‘BU로 갈 수 있게 풀어 달라’고 구단에 요청하는 등 선수들 사이에서 관심이 올라간 건 사실”이라며 “앞으로 한국 프로야구도 외국인 선수 수급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BU는 이달 24, 25일 두바이 인터내셔널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올스타전을 통해 팬들에게 첫선을 보일 예정이다. 두바이 인터내셔설 스타디움 역시 원래 크리켓 경기장이다. 크리켓 경기장에서 야구 경기를 치르는 건 드물지 않은 일이다. MLB도 2014년 호주 시드니 크리켓 그라운드에서 시즌 공식 개막전을 치른 적이 있다. BU는 “MLB 등 기존 야구와는 다른 우리만의 규칙으로 경기를 치를 것”이라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규칙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 미국에도 프로 크리켓 리그가 있다

미국에는 셰이크 CEO와 정반대로 생각한 이들이 있었다. 공과 방망이로 하는 야구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역시 공과 방망이로 하는 크리켓도 사랑할 것이라고 믿는 크리켓 팬들이 있었던 것. 이들은 1억 달러(약 1302억 원)가 넘는 돈을 투자받아 MI 뉴욕, 로스앤젤레스(LA) 나이트 라이더스, 샌프란시스코 유니콘스, 시애틀 오르카스, 워싱턴 프리덤, 텍사스 슈퍼킹스 등 6개 팀이 참가하는 ‘메이저리그 크리켓(MLC)’을 출범시켰다.

MLC는 올해 7월 14∼31일 첫 시즌 일정을 진행했다. 아난르 라자만 샌프란시스코 공동 구단주(52)는 “첫해 (리그) 매출이 500만 달러만 나와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800만 달러가 넘었다”면서 “벌써부터 내년 시즌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MLC 경기는 전 세계 87개국에서 전파를 탔다.

BU가 UAE를 등에 업고 있다면 MLC는 인도 크리켓 리그 IPL로부터 지원 사격을 받는다. 올해 MLC에 참가한 뉴욕(뭄바이), LA(콜카타), 텍사스(첸나이) 등 3개 팀이 IPL 팀의 ‘위성 구단’이다. 매출액을 기준으로 하면 IPL(110억 달러)은 전 세계에서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180억 달러) 다음가는 ‘부자 리그’다. IPL은 10개 팀이 두 달 정도 일정으로 한 시즌을 마무리하지만 30개 팀이 반년 동안 시즌을 이어가는 MLB(103억 달러)보다도 매출 규모가 크다.

크리켓이 이미 미국 시장을 ‘야금야금’ 점령해 가고 있다는 건 2028년 LA 올림픽 및 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 조직위원회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제안한 ‘추가 종목’ 리스트만 봐도 알 수 있다. IOC는 2021년 도쿄 대회 때부터 기존 올림픽 종목에 대회 조직위가 제안한 종목까지 추가해 대회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태권도에 밀려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되지 못했던 가라테(空手)가 도쿄 대회 때 정식 종목이 됐던 이유다.

LA 대회 조직위원회도 라크로스, 스쿼시, 야구·소프트볼, 플래그풋볼처럼 ‘미국적 특성’을 갖춘 스포츠를 정식 종목으로 추천했다. 그러면서 크리켓도 추가 종목에 포함시켰다. IOC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크리켓은 1900년 파리 대회 이후 128년 만에 올림픽 무대로 돌아오게 됐다. 야구와 크리켓이 나란히 올림픽 무대에 서는 건 처음이다.

ESPN은 “미국에 히스패닉 이민자가 늘어나면서 축구 인기가 올라간 것처럼 인도 이민자 증가와 크리켓 인기 상승 역시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서 “실리콘밸리에서 성공을 거둔 인도 이민자들이 주요 대학에 ‘크리켓 장학금’ 제도를 만든다면 축구보다 더 빠른 속도로 ‘미국 침공’을 끝마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황규인 스포츠부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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