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이 된 가자…숫자가 된 얼굴들 ‘10022’

선명수 기자 2023. 11. 6.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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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하마스 전쟁 한 달
양손 든 채 대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지상전이 강화되고 있는 5일(현지시간) 북부 거주 주민들이 이스라엘의 최후 경고에 따라 양손을 든 채 걸어서 대피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시낭송으로 가족 위로했던 소녀
아빠처럼 언론인을 꿈꿨던 소년
모든 것이 무너진 전쟁 속에서
여기, 그들의 이야기가 남았다

1만22명.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전쟁 한 달째를 맞은 6일(현지시간) 가자지구에서 숨진 이들의 숫자가 1만명을 넘어섰다. 하마스의 기습 공격으로 희생된 이스라엘인까지 더하면 이번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1만1500명에 육박한다.

가자지구 민간인 피해가 하루가 다르게 급증하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가자지구 보건당국이 발표한 사상자 수치가 “부풀려졌다”고 말했다. 전쟁은 희생자 숫자마저 논쟁의 대상으로 만들었지만, 유엔과 국제인권단체들은 자체 검증 결과 이 수치를 신뢰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여기, ‘숫자’로 불리는 얼굴과 이름들이 있다. 이스라엘군의 전투기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시를 낭송하며 가족을 위로했던 열세 살 소녀 아실, 아버지처럼 언론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열여섯 살 소년 마흐무드, 전쟁 와중에도 자신을 ‘운이 좋은 아이’라고 말했던 일곱 살 소년 유소프….

이번 전쟁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 희생자들의 이야기는 이 전쟁이 단순히 ‘숫자’로 명명된 이들의 세계를 어떻게 파괴했고, 남겨진 이들의 생에서 무엇을 앗아갔는지 또렷하게 증언한다. 이번 전쟁으로 세 아이를 잃은 여성 사디아는 “우리 아이들은 숫자가 아니다. 모든 아이들이 가치가 있는, 각자의 이야기를 가진 존재였다”고 말했다.

가자지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15세 팔레스타인 아이가 생애를 통틀어 다섯 번의 전쟁을 경험했을 정도로, 전쟁은 이곳에 반복적으로 찾아온 재앙이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공격의 강도와 사상자 규모 면에서 이전의 모든 전쟁을 압도하고 있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몸에 매일 이름을 새로 쓰고, 손목에는 팔찌를 채운다. 혹여 가족들 모두 변을 당하더라도 아이들이 ‘이름 없는 무덤’에 집단 매장되는 것을 막기 위한 표식이다. 전쟁 발발 한 달, 가자지구에선 삶에 대한 ‘희망’보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대비하는 일이 일상이 되고 있다.

여기 숫자가 된 얼굴들이 있다


지난달 7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이 한 달을 맞았다. 전쟁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에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겼지만, 특히 폭격에 무방비로 노출된 아이들에게 ‘재앙’이 되고 있다. 전쟁 발발 후 불과 3주 만에 가자지구에서 사망한 어린이 숫자는 지난 한 해 동안 전 세계 분쟁 지역에서 사망한 어린이 규모를 넘었다. 유니세프는 “가자가 어린이들의 무덤이 되고 있다”며 “문제는 이 끔찍한 희생자 숫자가 매일 크게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태어나 단 한 번도 가자지구 밖 세상을 구경하지 못한 채 너무 짧은 생을 끝낸 아이들의 이름과 사연 일부를 전한다.

열여섯 살이 겪은 “가장 폭력적인” 마지막 전쟁
마흐무드(16)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폭격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도시에서, 앳된 얼굴의 한 소년이 카메라를 응시하며 말한다. 알자지라의 가자지구 지국장인 아버지처럼 언론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소년은 전쟁 발발 후 가자지구 상황을 담은 영상을 찍어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올리곤 했다. 열여섯 생애 중 다섯 번의 전쟁을 겪은 소년은 결국 “내가 겪은 가장 폭력적인 전쟁”이라던 마지막 전쟁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피신해 있던 누세라이트 난민촌에서 어머니와 일곱 살 여동생 샴, 한 살배기 조카 아담 등 다른 21명과 함께 사망했다. 공습을 당한 난민촌은 이스라엘군이 대피령을 내리며 안전을 보장한 피난처였다.

만화영화 즐기며 “나는 운이 좋다”던 일곱 살
유소프(7)



유소프는 전쟁 와중에도 자신을 “운이 좋은 아이”라고 말해왔다. 이스라엘의 봉쇄로 가자지구의 전력 공급이 중단된 상황에서도 의사인 아버지가 설치해준 태양광 패널 덕에 남매는 이따금 좋아하는 만화영화를 시청할 수 있었다. 지난달 15일, 아이들이 TV 앞에 모여 있던 와중에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집이 무너졌다. 13세 누나와 9세 형은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가까스로 구조됐지만, 유소프는 숨진 채 발견됐다. 나세르 병원 방사선과 의사인 아버지 모하메드 아부 무사는 근무 중 폭격 소식을 들었고, 자신이 일하던 병원의 영안실에서 차가운 시신으로 변한 아들을 품에 안아야 했다.

치과 의사가 꿈이던 마젠과 동생
마젠(17)·아흐메드(13) 형제



지난달 17일, 알아흘리 병원 폭발로 471명이 한꺼번에 희생됐다.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병원이 한순간에 ‘지옥’이 됐다. 희생자 대부분은 폭격을 피해 병원 마당에서 피란 생활을 이어오던 민간인이었다. 이들 중에는 마젠과 아흐메드 형제도 있었다. 첫째 마젠은 치과의사가 꿈이었다. 둘째 아흐메드는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장난감과 학용품을 팔던 ‘용감한’ 아이였다. 두 아이를 잃은 마젠의 부모에겐 세 살 아들 파라즈만 남았다. 파라즈는 형들이 어디 갔는지 자주 묻는다. 형제의 아버지 아라파트 아부 마시는 “나는 그들이 천국에 있을 거라고 말했다. 어쩌면 그곳은 나의 두 아이에게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일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찍히기 좋아하던 아이…사진으로만 남다
살리(5)



피란민들이 집결해 있는 가자지구 남부도시 칸유니스에 대규모 공습이 있었던 지난달 17일, 쉴 새 없이 밀려드는 환자와 가족의 시신을 확인하려는 유족들로 복잡한 나세르 병원에서 한 여인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흰 천에 싸인 아이의 몸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 여인의 품에 안긴 아이는 다섯 살 조카 살리였다. 살리는 각별한 조카였다. 여느 아이들처럼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하던 살리는 유치원에 가는 길마다 할머니 집에 들러 이모 이나스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졸랐고, 이나스의 휴대폰에는 여전히 살리의 사진과 영상이 가득하다. 이날 공습으로 살리 가족은 네 살 동생 아흐메드를 제외하고 모두 숨졌다. 현재 이모 이나스와 함께 살고 있는 아흐메드는 가족들이 어디에 있냐고 묻는 것 외에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부모 잃고 살아남은 너…누가 이름 지어줄까
마리암의 아들(생후 3주)



전쟁 발발 7일차였던 지난달 13일, 중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온 산모가 마지막 숨을 뱉었다. 의사들은 서둘러 응급 제왕절개 수술을 시행해 아기를 꺼냈다. 심장 박동은 희미했지만, 아기는 살아서 세상에 나왔다. 아기에겐 아직 이름이 없다. 이름을 붙여줄 가족 10여명이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모두 숨졌기 때문이다. 인큐베이터 속 아기의 작은 발목에는 ‘마리암의 아들’이라고 쓰인 분홍색 명찰이 달렸다. 의료진은 가까스로 태어난 아기를 ‘기적’이라 부르지만, 이 기적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연료 부족으로 알시파 병원의 주발전기가 가동을 멈춰 보조발전기로 유지하고 있는 조산아들의 ‘생명줄’ 인큐베이터도 머지않아 멈출 수 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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