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모두에게 당연한 일은 없다
11월 대학수학능력시험 무렵이면 지인들의 대화나 소셜미디어에서 수능 경험담이 화제에 오르는 경우가 많다. 자기 때는 ‘역대급 물수능’이라 한두 문제 틀리면 어떻게 됐다, 언제는 ‘불수능’이었다는 식의 고생담이 주로 등장한다. 개인적으로는 1993년 처음 시행된 수능을 치른 데다 한 해에 수능을 두 번 본 유일한 경우이고, 8월 수능과 11월 수능의 충격적 난이도 격차를 겪었기 때문에, 수능 경험담으로 할 얘기가 적지는 않다.
이런 얘기가 오가는 것은 당사자들이 모두 수능을 치른 대졸 이상 학력을 가졌다는 뜻이다. 수능 얘기를 거리낌 없이 꺼낼 수 있는 것은 한국의 대학 진학률이나 전반적 학력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점점 사회·경제적으로 비슷한 사람들하고만 교류하고 살아가는 세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여기에 갇혀 있으면 실제 세상의 모습을 놓칠 수 있다.
대형 로펌에서 나와 법률사무소를 개업하며 처음 직원을 구할 때 상업고등학교 졸업반 학생을 채용했다. 교복을 입고 면접을 보러 왔고, 미성년자라 부모님을 오시라고 하여 근로계약서를 체결했던 기억이 난다. 같이 일을 하다 보니,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알았고 업무를 하는 태도나 능력은 학벌과 무관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실제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직원을 볼 때면, 특히 수능 뉴스가 언론을 뒤덮을 때면, 수능을 치르지 않은 사람이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부끄럽지만 나도 한국 사회가 수능을 너무 쉽게 보편적인 일로 여긴다는 문제의식은 없었는데, 그 직원과 같이 근무하며 비로소 명확하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최근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70%를 약간 넘는다. 통계가 현실을 어떻게 반영하는지는 항상 해석이 필요하지만, 대략 고등학생 10명 중 2~3명에게 수능은 무관한 일이라고 이해해도 괜찮겠다.
이런 사실과 별개로 교육열의 나라 한국에서 수능은 국가적 이벤트다. 올해 치러진 수능 혹은 몇년 후에 시행될 수능 개편안에 관한 소식은 뉴스 첫머리를 차지한다. 최근 몇년간 수능날의 날씨가 어땠는지 기록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수능 당일에는 관공서의 출근시간이 조정되고, 증권시장도 외환시장도 개장을 1시간 늦춘다. 심지어 영어 듣기 평가를 하는 시간에는 항공기 이착륙도 잠시 멈춘다. 교육에 대한 이런 관심과 열정은 식민지배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최빈국을 지금처럼 발전된 나라로 만들었다. 하지만 수능이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은 아니다.
주변에 수능을 준비하는 자녀를 둔 사람이 많고 수험생을 뒷바라지하는 부모의 긴장감은 나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한참 전 일이고 지금의 치열한 경쟁과 비교하긴 어렵지만 나도 그 시험을 겪었기에, 그 나이에 감당하기 쉽지 않을 부담감을 안고 있을 수험생들을 생각하면 짠한 마음을 감추기 어렵다. 안전 등의 문제를 고려하면 수능 당일 출근시간을 조정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시험장이 공항 근처라는 이유로 제 실력을 발휘 못하는 경우가 없도록 항공기 이착륙 시간을 조정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는 방안이겠다. 수능이 끝난 직후 수능 수험표가 할인의 증표가 되는 것 역시 열심히 노력한 학생들이 누릴 만한 일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은 누구나 당연히 수능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한편으로 생각하면 좋겠다. 중요한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이 최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응원하는 것과 그 시험이 마치 이 사회의 표준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르다. 누군가는 수능과는 무관한 인생을 살 수도 있고, 사람마다 삶의 시간표가 다르니 어떤 사람은 18세가 아니라 인생의 다른 시점에 수능을 볼 수도 있다. 사적인 영역에서는 혹시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정치나 공적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언론처럼 공적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은 18세 청소년은 누구나 수능을 보는 것처럼, 수능이 전 국민의 문제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면 곤란하다.
어떻게 보면 이건 입시나 학력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다치게 할까 배려하는 문제도 아니고, 대졸자·고학력자가 과대 대표되는 문제라고 비장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태도일 뿐이다. 누구도 같은 인생을 살지 않으니 각자의 삶을 존중해야 하고, 같은 나이대의 사람 열에 일곱은 겪는 일을 하지 않는다 해서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되고, 다수에 속한 사람이 누구나 다 자기와 같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너머에 있는 삶을 무시하면 곤란하다는 것. 그리 복잡하거나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나.
유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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