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노봉건주의와 봉건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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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서구에서는 테크노봉건주의(technofeudalism)라는 화두가 뜨겁다.
테크노봉건주의는 불로소득 자본주의(rentier capitalism)와 유사한 개념이지만, 미묘하게 다르다.
같은 지대추구형 경제라도 테크노봉건주의는 더는 자본주의가 아닌데, 바루파키스는 그 이유를 이윤과 시장이라는 자본주의의 두 근간이 플랫폼이라는 디지털 영지로 인해 주변부로 밀려났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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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한국사회]
[똑똑! 한국사회] 이주희 |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지금 서구에서는 테크노봉건주의(technofeudalism)라는 화두가 뜨겁다.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아테네대학 경제학과 교수가 최근 출간한 책 제목이기도 하다. 나는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후폭풍으로 그리스가 폭동에 휩싸여 있던 2008년 12월, 바루파키스가 조직한 국제학회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데모의 나라’ 한국에서 내가 오는 바람에 그리스가 이렇게 되었다는 다소 공격적인 농담을 상쇄시킬 만큼 그의 지성은 매력적이었다. 채무위기를 겪던 그리스의 재무장관을 잠시 지내기도 했던 그는 탁월한 학자이자 평론가이다.
1990년대 말 닷컴버블에서 생존한 소수 벤처기업은 2008년 이후 막대한 양적완화의 혜택 속에서 빅테크로 성장했다. 테크노봉건주의는 불로소득 자본주의(rentier capitalism)와 유사한 개념이지만, 미묘하게 다르다. 같은 지대추구형 경제라도 테크노봉건주의는 더는 자본주의가 아닌데, 바루파키스는 그 이유를 이윤과 시장이라는 자본주의의 두 근간이 플랫폼이라는 디지털 영지로 인해 주변부로 밀려났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마치 강력한 바이러스가 숙주를 죽여 함께 멸망하듯이, 너무나 성공적이었던 자본주의가 더 성공적인 클라우드 자본에 의해 종말을 맞이한 것이다. 산업 자본가는 이제 상품을 팔 때마다 디지털 영지에 천문학적인 수수료를 내는 봉신에 불과하다. 빅테크 영주를 사랑하는 테크노 농노는 희망 없는 변방에서 불안정 저임금 노동에 종사하면서도 기꺼이 삶과 밀착된 정보를 생산해 영주가 더 많은 광고료를 벌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런 테크노봉건주의의 위협에 맞서 유럽연합은 디지털시장법의 본격적인 시행을 앞두고 있고, 미국도 반독점 소송 등을 통해 독점 플랫폼 규제를 시작했다. 이들은 플랫폼 기업에 사용자의 책임을 부여하는 방안도 상당히 진전시켰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아직도 플랫폼 자율규제의 원칙을 바꾸고 있지 않다. 대통령이 후보 시절 손바닥에 ‘王’(왕) 자를 썼던 탓일까? 4차 산업혁명이 무르익어가는 이 중요한 시기에 2차 산업혁명에 기반한 노동법과 사회보장법조차 후퇴시키는 봉건정치가 한창 진행 중이다.
봉건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왕 마음대로 하는 것, 즉 민주적 책임성의 결여이다. 노조법 2, 3조 개정안(노란봉투법)에 반대하고, 노동시간을 늘리려 하고, 산업재해를 방치하고, 기술경쟁에 무지한 채 연구개발(R&D) 예산을 줄여 학문 후속세대 일자리를 뺏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대선 때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다. 모든 일하는 사람을 위한 기본법, 비정규직 사용 총량 규제, 사회복지 종사자 임금 인상과 권익 보호는 어디로 갔는가? 대선 공약집에 넣고도 하지 않는 일이 너무나 많은데, 김포시 서울 편입 같은 급조된 총선용 공약을 과연 지킬 수 있을까?
봉건정치의 또 다른 특징은 불평등을 양산하는 사회적 위계를 확대재생산하는 것이다. 플랫폼 노동자처럼 오분류된 ‘위장 자영업자’를 보호할 방안이 배제된 연금개혁 논의는 공허하다. 보험료율을 청년세대에만 천천히 올리면 문제가 해결될까? 결국엔 그들도 늙는다. 죽음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부자가 빈자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아 훨씬 더 많은 연금과 보건의료 비용을 소비한다. 이제는 재분배 기능이 크게 줄어든 적립식 전환까지 합세해 세대 내 엄청난 불평등을 묵인하는 기계적인 형평성 강조는 사회를 더 불평등하게 만들 뿐이다. 사회보험은 수년간의 짧은 교육 이후 40년 이상 안정적으로 일하고, 은퇴 뒤 몇 년 못 살았던 시대에 기획된 제도이다. 지금은 부자 감세가 아니라 로봇세, 탄소세, 데이터세를 도입하고 기본소득과 같은 새로운 발상을 시작할 때다.
그런데, 봉건시대의 왕은 군웅할거로 매우 취약했다. 테크노 농노는 중세 농노와는 달리 투표권이 있다. 앞으로 이 중요한 권한이 잘 행사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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