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신문에선 왜 숫자에 쉼표를 안 찍을까
지난 10월은 노벨상의 계절이었다. 2023년 노벨물리학상은 ‘아토초의 세계’를 연 3명의 과학자에게 돌아갔다. 이름도 생소한 ‘아토초’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아토초는 100경분의 1초를 말한다. ‘100경분의 1’이라니, 감이 잡히지 않는다. 우리가 엄청나게 빠른 것을 ‘순식간’이나 ‘찰나지간’ 또는 ‘눈 깜짝할 사이’라고 하는데, 100경분의 1초는 어느 정도의 빠르기일까?
우리말 숫자는 ‘만 단위’로 커져
우리말에서 수를 나타낼 때 쓰는 말은 만, 억, 조, 경까지가 일반적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이 1조6700억 달러, 한화로 약 2300조 원이었다. 미국은 25조4600억 달러, 약 3경4000조 원이었다. 미국 경제 규모가 대략 우리의 15배 크기다. 우리는 아직 ‘경’의 단계를 접하지 못했지만, 심심치 않게 보도되는 미국 경제 소식을 통해 그나마 ‘경’의 세계를 얼추 이해할 수 있다.
만, 억, 조, 경 사이에는 단계마다 ‘만 배’씩의 차이가 있다. 1만분의 1도 헤아릴 수 없는 세계인데, 그것이 네 번을 거듭해야 비로소 1경분의 1에 도달하니 아토초, 즉 100경분의 1초는 초미시의 세계임을 알 수 있다. 이쯤 되면 ‘순식간’이나 ‘찰나지간’ ‘눈 깜짝할 사이’ 같은 시간은 거의 영겁(永劫)의 시간인 셈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이 있다. 수량을 작은 단위로 수렴해갈 때 우리는 1만분의 1, 1억분의 1, 1조분의 1, 1경분의 1로 내려간다. 이에 비해 영어권에선 마이크로(100만분의 1), 나노(10억분의 1), 피코(1조분의 1), 펨토(1000조분의 1), 아토(100경분의 1) 등의 극미세 단위로 표시한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 ‘배수’가 다른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말은 ‘만 배’씩 뛰는 데 비해, 영어권에선 ‘천 배’씩 벌어진다.
우리말이 만 배씩 늘어난다는 것은 우리말 수의 표현이 ‘만 단위’라는 것과 같은 얘기다. 일·십·백·천, 만·십만·백만·천만, 억·십억·백억·천억, 조·십조·백조·천조…. 이렇게 나아가는 게 만 단위다. 한글맞춤법 제44항이 우리말 숫자 단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수를 적을 적에는 만(萬) 단위로 띄어 쓴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용례로는 ‘십이억 삼천사백오십육만 칠천팔백구십팔’ ‘12억 3456만 7898’을 제시했다.
‘천 자리’ 쉼표는 영미식 표기
한글맞춤법에선 왜 이와 같이 만 단위를 규정했을까?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말에서 숫자를 만 단위로 읽기 때문이다. 일, 십, 백, 천 위로 만, 억, 조, 경, 해… 이렇게 올라가는 게 만 단위다. 각 단위는 10의 4승, 즉 ‘만 배’씩 올라간다.
이에 비해 영어권에선 숫자가 ‘천 단위’로 올라간다. thousand(천, 10의 3제곱), million(백만, 10의 6제곱), billion(십억, 10의 9제곱), trillion(조, 10의 12제곱)…. 숫자를 잘 보면 10의 3승, 즉 ‘천 배’씩 늘어난다. ‘1234567890원’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이런 숫자에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쉼표를 찍는다. 1,234,567,890원. 영어로 읽으면 1billion, 234million, 567thousand, 890이다. 기다란 숫자에 셋째 자리마다 콤마를 찍는데,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어려서부터 숫자 표시를 서양식으로 배우고 익혀온 결과다.
하지만 실제로 읽을 때는 영어에서처럼 billion, million이 바로 나오지 않는다. 숫자를 일십백천… 하고 따져봐야 한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12억 3456만 7890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숫자를 ‘만 단위’로 셈하기 때문에 쉼표와 상관없이 읽는다. 이렇게 적고 나면 굳이 셋째 자리에 쉼표를 찍을 필요도 없어진다. 훨씬 간결하다. 신문에서 이런 표기를 도입한 게 대략 20년도 훨씬 전이다. 당시 한국경제신문이 앞장섰고, 많은 신문이 뒤를 이었다. 아라비아숫자만 쓸 때도 ‘12,3456,7890원’ 식으로 ‘만 단위’에 쉼표를 찍으면 읽기에 좀 더 편하다. 숫자만 쓸 때는 이미 서양식 표기 방식이 관습으로 굳어진 뒤라 굳이 바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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