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동생 떠난 서해 상공서 국민조종사로 날다

2023. 11. 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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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 종수는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공군 제10전투비행단에서 전투조종사로 근무하다 2005년 7월 13일에 서해 상공 야간작전 중 순직해 고인이 됐다. 그 사건은 우리 가족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고, 그 후 18년 동안 동생에 대한 그리움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던 지난 8월 초 공군에서 '제9기 국민조종사'를 모집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먼저 간 동생이 떠올랐다. 20대 시절 조종사를 꿈꾸며 호주 비행학교에서 비행면장을 받아 국내 항공사에 도전하던 시절도 떠올랐다. 동생에 대한 그리움과 부모님과 조카들에 대한 짐, 그리고 잊었던 꿈이 복잡하게 엉켰다. 며칠 고민 끝에 지원서를 보내고 곧바로 체력훈련에 돌입했다. 4명 선발에 2768명이 지원해 692대1이라는 사상 최고 경쟁률로 접수가 마감됐다는 언론 보도를 봤다.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동생과 가족들을 생각하면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1차 서류심사를 통과해 면접 대상자로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고 함께 선정된 40명의 2차 후보자와 면접에 임했다. 누가 선발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감동적인 사연과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주눅이 들었지만 당당하게 면접에 임했다. 추석 연휴 이후 면접을 통과해 비행환경적응훈련 대상자로 선발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국민조종사 선발을 위한 마지막 관문인 비행환경적응훈련이 남아 있었다. 전투조종사들이 실제로 받는 가속도내성훈련, 비상탈출훈련, 저압실훈련 등을 통과해야만 했다. 체력훈련과 호흡법을 철저히 준비해왔지만, 막상 훈련을 시작하니 두려웠다. 하지만 죽어도 좋으니 절대 기절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가속도내성훈련에 임했고, 한 번에 통과했다. 며칠 뒤 제9기 국민조종사로 최종 선발됐다는 전화를 받았다.

드디어 비행 탑승일인 10월 21일, 가족들과 지인들을 초대해 새벽에 서울공항으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먹구름이 끼며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고생 끝에 여기까지 왔는데 비행을 못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비행 전 준비를 마치고 하늘을 바라보는데 두꺼운 먹구름 사이로 갑자기 파란 하늘 한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생을 만나게 해주려고 하늘이 도와주고 있었다.

활짝 펼쳐진 푸른 하늘로 다른 국민조종사들과 지상을 박차고 이륙했다. 첫 번째로 향한 곳은 동생이 순직한 장소인 서해 상공이었다. 임무조종사는 서해대교를 지나면서 동생에게 말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18년 만에 동생이 순직한 하늘에 공군 T-50 훈련기를 타고 와보니 눈물이 쏟아졌다.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간신히 몇 마디를 남겼다.

비행을 마치고 착륙하는 곳에 부모님이 와 계셨다. 사실, 국민조종사로 선발되고 나서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자칫 부모님의 상처가 덧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기뻐하시며 큰일을 해서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내가 지고 있던 큰 짐 하나를 덜어낸 것 같았다. 국민조종사 임명식에서 공군조종사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를 받았다. 동생이 매고 임무에 임했던 빨간 마후라였다. 빨간 마후라 앞에서 전투조종사로 대한민국을 지키다 산화한 동생을 잊지 않고, 조카들을 포함해 가족들을 더 사랑하고, 조금이나마 더 대한민국에 이바지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해본다.

[김종섭 제9기 국민조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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