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총제·금산분리 강화 등 점진적이어서 저평가된 개혁
인수위 시절부터 내·외신 등
재벌개혁에 각별한 관심 보여
재벌은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한국경제 특유의 기업결합 형태다. 재벌은 이승만 정권 때도 존재했지만 박정희 정권 때 급성장했다. 정부가 경제성장을 국정 최고목표로 삼고 경제성장을 위해서라면 반칙, 편법도 눈감아주고, 금융 세제상 온갖 특혜를 주면서 키운 것이 한국 재벌이다. 그 뒤 역대 정부는 정권 초기에는 서슬 퍼렇게 재벌개혁의 칼을 뽑았으나 후기에는 항상 흐지부지돼 재벌개혁은 아직도 미완이다.
참여정부 때도 재벌개혁이 국내외 주요 관심사였다. 2003년 1월21일(화) 2시 내가 속한 인수위 경제1분과에서 노무현 당선자가 참석한 가운데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질서’ 토론회가 열렸다. 허성관 위원이 사회를 보고, 이동걸, 정태인 위원이 역대 정부의 재벌개혁이 왜 늘 용두사미가 됐는지 재경부를 추궁하니 김영주 차관보가 대답하느라 애를 먹었다. 2월4일(화) 3시 경제1분과 주최로 재벌개혁 문제를 토론했다. 권영준, 김상조 교수, 이인권 박사(한경연) 등이 참석해 출자총액제한제도(출총제), 금융업-산업 분리(금산분리)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김석조 교수(전 서울대 법대)는 증권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집단소송제를 시행할 것을 주장했다.(그 뒤 참여정부에서 증권집단소송제는 도입했는데 다른 분야는 아직 도입되지 않았다).
외신은 재벌개혁 문제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2월18일(화) 100년 넘는 역사를 갖는 세계적 권위의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배리 브라이언 기자와 인터뷰했는데, 주로 새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 특히 재벌, 금융, 노동문제를 집중적으로 물었다. 2월28일(금)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슈만 기자와 인터뷰했는데 주로 노사문제, 민영화, 재벌개혁을 질문했다. 7월10일(목) 영국의 권위 있는 경제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가 한국에 재벌개혁이 필요하다는 전면 특집을 냈다.
출범 반년만에 공정위 주도로‘시장개혁 3개년 계획’ 마련
겁주는 대신 예측 가능케 하고실행 가능한 것부터 차근차근
증권 집단소송제 도입하고회계법인 교체도 의무화해
담합 과징금·신고포상금 올려금융계열사 의결권 15% 제한
2003년 4월2일 노 대통령 국회 시정연설에서 ‘시장개혁 3개년 계획’의 비전과 목표를 제시한 데 이어, 5월부터 민관합동팀이 ‘시장개혁 3개년 계획’ 작업에 들어갔다. 10월24일(금) 오후 6시 은행회관에서 공정위가 몇달간 준비한 ‘시장개혁 3개년 계획’을 토론했다. 계획 발표 여부를 놓고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은 조기 발표를 주장한 반면, 김진표 부총리는 대통령 재신임 문제도 있고 경기도 나빠 재계 반발이 걱정된다며 발표를 미루자고 했다. 나는 대통령 재신임을 위해서라도 재벌개혁 계획을 발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정재 금감위원장이 공정위 안이라 하지 말고, 1안, 2안으로 내놓고 학계, 재계 의견을 수렴한 뒤 12월 중 확정하자는 절충안을 제시해 채택됐다. 이어서 김칠두 산자부 차관, 박병원 재경부 차관보와 함께 3개년 계획 내용을 검토했다. 출총제 등 몇몇 조항 관련 재경부, 산자부 의견을 반영하여 큰 틀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10월29일(수) 오전 10시40분 대통령 집무실에서 열린 ‘시장개혁 3개년 계획’ 회의에 강철규 위원장, 김진표 부총리, 권오규 정책수석, 조윤제 경제보좌관, 김영주 차관보와 내가 참석했다. 오래 토론을 거친 뒤라 내용에는 이견이 없고, 시기는 10·29 부동산 대책이 발표됐으니 이튿날 발표하기로 했다. 재경부가 반대하고 연기하자고 하는 바람에 난항을 거듭했지만 집권 8개월 만에 드디어 참여정부의 재벌개혁 의지가 모습을 드러내 기뻤다.
참여정부에서는 ‘재벌개혁=용두사미’라는 나쁜 전통을 깨기 위해 접근방법을 바꾸었다. 초장부터 재벌 겁주지 말고, 미리 개혁 청사진을 발표해 예측 가능하게 하고, 실행 가능한 것부터 차근차근 진행하는 방법이다. 용어도 재벌개혁 대신 온건하게 ‘시장개혁 3개년 계획’이라 불렀다.(상세한 내용은 강철규 등 공저, ‘경국제민의 길’, 굿플러스북, 2015 참조).
재벌의 가장 큰 문제는 소유지배구조다. 지배주주가 불과 2~3% 지분으로 계열사 간 순환출자를 통해 지배권을 확장하여 실질소유권보다 훨씬 큰 의결권을 행사하는 문제다. 이를 통해 지배주주가 의사결정권을 독점하고, 소액주주 희생 위에 사익을 추구한다. 이것이 대외적으로 한국 기업의 상대적 저평가(Korea Discount)의 주요 원인이었다. 게다가 계열사 진입․퇴출 저해로 인한 과잉설비, 위기시 순환출자 계열사들 동반부실 위험, 중소 및 중견기업 성장 저해 등 여러 문제를 일으킨다. 그래서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기업집단 계열사 및 친인척 간 지분보유관계를 매년 공개하고, 출총제를 합리적으로 개선해 소유와 지배의 괴리를 축소하며, 선진국형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을 유도하기로 하였다.
투명 책임경영 강화를 위해 기업 내·외부 견제시스템 및 회계투명성을 강화하고, 증권집단소송제를 도입하고 회계법인 교체를 의무화했다. 경쟁 촉진을 위해 170여개 경쟁제한적 제도를 정비하고, 시장경제의 적인 카르텔을 깨기 위해 과징금과 제보자 보상금을 높였다. 그러나 참여정부 후기 이런 과제들은 흐지부지되거나 중단된 경우가 있었고, 재벌들이 싫어한 출총제는 이명박 정부 들어오자마자 2008년 폐지됐다. 그 뒤 재벌 계열사 숫자가 2배로 늘어났고 재벌체제의 폐단은 더 심해졌다.
또 하나 중요한 개혁은 재벌 금융계열사가 보유하던 계열사 주식의 의결권을 제한한 것이다. 경제에서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은 수레의 두바퀴처럼 상호보완적 역할을 한다. 이 두 자본은 서로 분리되어 활동해야 하며 둘이 결합하면 큰 부작용이 발생한다. 산업자본의 금융지배는 과도한 경제력 집중, 금융회사 고객과 산업자본의 지배주주 간 이해상충, 금융이 지배주주의 사금고로 전락할 위험 등 문제가 많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엄격하게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을 분리하고 있다.(금산분리)
우리나라도 은행에 관해서는 엄격한 금산분리(은산분리)를 시행 중이나 제2금융권 즉 보험, 증권 등은 산업자본의 진출을 허용하고 있다. 재벌의 금융지배 폐해가 심각해지자 1986년 12월 금융계열사가 보유한 계열사 주식의 의결권 행사를 전면 금지했다. 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외국인의 적대적 인수합병 위협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2002년 1월 의결권 행사를 30%까지 허용했다. 그러자 재벌의 금융지배가 심화하면서 재벌들의 문어발식 확장이 더 심해졌다.
‘시장개혁 3개년 계획’에서는 이 비율을 15%로 낮추는 개혁을 시도했다. 물론 재벌들은 저항하고 재경부가 반대했지만, 강철규 위원장의 객관적 자료 분석에 바탕한 주장이 논쟁에서 이겼다. 결국 의결권 행사 제한 기준을 30%에서 매년 5%포인트씩 인하해 3년 뒤 15%로 낮아져 금산분리 원칙에 한발짝 다가가는 큰 개혁이 이루어졌다.
훗날 ‘참여정부 평가 심포지엄’…김상조 “재벌개혁, 한 게 없어”
강철규 교수 반박하나 싶었더니“김 교수 말 맞겠죠”…웃음만
참여정부의 재벌개혁은 역대 정부의 용두사미 개혁과 달랐다. 요란한 소리 내지 않고 대화와 설득을 통해 점진적으로 조용히 이루어졌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성과를 잘 모른다. 참여정부가 끝난 직후 서울대에서 참여정부 평가 심포지움이 열렸다. 다수 학자가 모여 온종일 여러 분야 정책을 평가하고 토론했다. 김상조 교수(나중에 문재인 정부의 공정거래위원장 및 정책실장)가 참여정부가 재벌개혁을 위해 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혹평했다. 사회가 청중석에 앉아 있던 강철규 교수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시장개혁 3개년 계획, 출총제, 지주회사,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 이야기를 하며 반박하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강철규 교수는 웃으며 딱 한마디만 했다. “김상조 교수가 그렇게 말하면 그 말이 맞겠지요.” 아, 이런 신사가 있나. 강철규 교수의 인품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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