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에게 해외 연수가 필수과목 되면?
일본의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는 근대기에 막부 체제를 무너뜨리고 천황제 확립에 이바지한 정치인이다. 메이지유신 이후인 1871년 12월 23일, 이와쿠라는 107명이나 되는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증기선 '아메리카 호(SS America)'에 올라 요코하마를 떠나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자기네 나라를 강제적으로 개항시킨 서구 열강이 도대체 어떤 나라인지 시찰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을 '이와쿠라 사절단'이라 부른다.
사절단에는 일본의 내로라하는 정치인, 관리, 유학생들이 포함되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미국에서 8개월 동안 머물렀고, 이후 대서양을 건너 유럽 각국을 순방했다.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러시아,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이다.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이야기를 나눴을지 짐작이 간다.
돌아올 때는 지중해에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여 홍해를 거쳐 실론(스리랑카), 싱가포르, 사이공, 홍콩, 상하이 등을 방문했다. 이곳들은 전부 유럽의 식민지였다.
그렇게 1년 10개월 만인 1873년 9월 13일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이후 일본의 정치, 경제, 과학, 사회, 교육, 문화, 의학 등 여러 분야에서 변화가 시작됐다. 일본의 근대화에는 이들의 영향이 상당히 크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나라도 근대기에 외국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른바 조사(朝士) 시찰단이다. 일본의 사절단보다 약 10년 늦은 1881년 일본의 근대 문물을 배워오기 위해 조선 정부가 파견했다. 일본보다 훨씬 적은 6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 개화파들이었다. 그들은 4월 10일 상선 안네이마루(安寧丸)를 타고 부산에서 출발하여 다음날 나가사키에 도착한 후 아카마세키-오사카-고베-요코하마를 거쳐 4월 28일 도쿄에 도착하였다. 이후 약 74일 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일본 관공서를 비롯하여 각종 시설을 탐방하고, 신문물을 접하고, 제도를 연구했다.
그들이 들른 곳은 무척 많다. 포병 공창, 조폐소, 인쇄국, 방적 공장, 제사소, 양잠소, 광산, 도기소, 초자 제조소, 피혁장, 육종장, 도서관, 박물원, 박람회, 맹아원, 병원, 신문사, 전신소, 등대, 천문소, 각종 학교를 둘러보았으며 관제, 군제, 세제, 세관, 통상지법, 도량형, 형법, 경찰 제도, 감옥 등도 살펴보았다.
일본이 이와쿠라 사절단을 파견한 이유는 서구의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서였고, 고종이 조사 시찰단을 파견한 이유는 일본의 근대 문물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조사 시찰단이 돌아온 후 29년 후인 1910년, 대한제국은 지도에서 그 명칭이 사라지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반면 일본은 열강으로 발돋움했다. 그 차이점은 무엇일까?
일본의 히로히토(裕仁)는 1901년 출생해 1926년에 제124대 쇼와(昭和) 천황이 됐으며 1989년 1월 7일 사망했다. 그는 황태자 시절인 1921년에 수행단을 이끌고 해외 순방길에 올라 5개월 동안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을 돌아보았다. 4년 후 천황에 오른 그는 일본의 현대화와 침략 전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조선의 마지막 왕(실제로는 대한제국의 2대 황제) 순종은 1874년 출생해 1907년에 27번째 왕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일본의 침략을 이겨내지 못하고 1910년 왕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16년 후인 1926년에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히로히토가 천황에 오른 해이다. 순종은 히로히토와 달리 조선 땅 밖으로 나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시간을 되돌려, 만일 고종이 황태자 시절의 순종을 해외로 시찰 내보냈다면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고종이 조사 시찰단에 순종을 포함해 미국과 유럽의 근대 문물과 제도를 살펴보게 했다면 순종은 어떤 마인드로 나라를 이끌었을까? 지금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을 품어 본 다면, 순종은 일본의 침략을 이겨 냈을지도 모른다.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는 일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특히 빠를수록 좋다. 젊은 나이에 여행해야 하는 이유는 사고방식이 굳기 전에 넓은 세계로 나가 더 많은 것, 색다른 것, 특이한 사람들, 특별한 풍속을 접하고 인생을 풍성하게 가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나톨 프랑스는 "여행이란 우리가 사는 장소를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각과 편견을 바꾸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베이컨은 "여행은 젊은 사람에게는 교육의 일부이며 나이 많은 사람에게는 경험의 일부이다"라고 설파했다. 여행은 관념을 바꾸는 기제이며 그 자체가 교육이다.
나는 1979년, 대학 3학년(본과 1학년) 시절인 22살 때 인도, 태국, 홍콩으로 여행을 떠났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에 군 미필자에겐 해외여행 허가가 무척 엄격하고 까다로운 시기였다. 나는 허가를 받아 인도로 떠났는데 '군 미필자 해외여행 1호'의 혜택을 받았다. 20일에 걸친 그 여행은 나에게 큰 충격과 기쁨을 주었다. 개발도상국에서 막 벗어나려는 한국과 당시로서는 아시아 강국이었던 태국을 비롯해 고유의 문화가 살아 있는 천의 얼굴 인도, 아시아의 진주라 불리는 홍콩 등은 한국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살았던 나에게 세계라는 꿈을 갖게 해 주었다.
1993년 고려대 의대 전임교원이 된 이후 해외 연수를 3차례(1996~98, 2008, 2018) 다녀왔고 해마다 학회 참석과 발표 및 토론을 위해 약 20회씩 해외 출장을 다녔다. 해외 경험과 배움의 기회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심장내과 분야에서 훈련받을 당시 펠로(전임의) 신분으로 있을 때 노영무 지도 교수님과 함께 해외 학회 및 해외 명문 대학과 연구소 탐방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너무 귀한 경험이자 자산이 되었다.
노영무 교수님 덕분에 1991년 미국 LA에 있는 시더스사이나이 병원에서 Peng-Sheng Chen과 Chun Hwang 선생님을 만난 것은 나의 인생에서 너무 멋진 세렌디피티 선물이 아닌가 싶다. 그 이후로 나는 지금까지도 그분들과 교류하며 많은 가르침을 받고 있다. 또 선배이셨던 오동주, 심완주 교수님 등과 동행한 해외 학회와 여행을 통해 세상을 좀 더 넓게 보는 안목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진입하고 의술이 세계 10위 안에 든 지금도 나는 해외 견학과 연수, 탐방을 멈추지 않고 있다. 나라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베이컨의 말처럼 교육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대학 교육에선 해외 연수가 하나의 커리큘럼이 돼야 할 것이다.
김영훈 교수 (yhkmd@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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