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로 무대 넓힌 ‘정세랑 월드’…‘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인터뷰]
이미 3권까지 구상…10권까지 내고파
집필은 ‘9 to 6’…‘주섬주섬’ 쓰는 스타일
또 하나의 ‘정세랑 월드’가 열렸다. 책마다 베스트셀러에 올라 ‘2030 여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로 꼽히는 정세랑이 이번엔 역사 추리 소설을 들고 왔다.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그동안의 소설과 달리 이번에는 명랑한 장르 문학이다. 읽는 재미를 한껏 더한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문학동네). 통일신라 시대의 ‘셜록 홈스’쯤 되는 ‘설자은’ 시리즈는 <설자은, 불꽃을 쫓다> <설자은, 호랑이 등에 올라타다> 등 최소 3권을 구상해뒀다. ‘오전 9시~ 오후 6시’에 컴퓨터를 켜고 ‘주섬주섬’ 글을 쓴다는 정세랑은 ‘설자은 시리즈’를 10권까지 내고 싶다고 했다. 그를 지난달 30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원래 고대사 취향이에요. 현대사는 너무 가까이 들여다보면 누군가의 죽음이 아파요. 반면 고대사는 슬픔이 휘발되더라고요. 신기했어요. 고대의 무덤을 발굴해도 우리 모두 기뻐하잖아요. 생각해보면 패총은 음식물쓰레기 더미고, 천마총도 무덤인데 재미있게 뒤지잖아요. 화장실을 발견하면 기생충도 있었다고 알아내고, 심지어 씨앗이 발견되면 발아도 시켜보잖아요. 슬픔도 오염도 희미해진 상태에서 보는 게 신기했어요.”
소설의 배경은 이제 막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와 전쟁을 마친 680년대 후반 통일신라. 정세랑은 “(고대 중에서도) 삼국통일 이후 풍요가 잠깐밖에 유지되지 않고 사그라든다는 점이 흥미로웠다”고 했다. 주인공 설자은은 육두품 출신 아버지의 여섯째 딸 미은이 남장한 캐릭터이다. 첫째·둘째 아들 모두 전투 중에 죽었다. 집안을 일으켜야겠다는 신념으로 가득 찬, ‘이상한’ 셋째 아들 호은은 집안의 총명한 다섯째 아들 자은마저 병으로 숨을 거두자 미은에게 “오늘 죽은 것은 너”라고 한다. 총명한 미은은 죽은 ‘자은’이 되어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다.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설자은은 통일신라의 수도 금성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일을 해결해간다.
고려대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한 정세랑은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역사 소설에 도전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빨리 쓸 수 있는 장르가 아니었어요. 역사 소설은 ‘공기’를 만들어내야 하거든요. 뭘 먹었으며 어떻게 살았는지…. 당시 사회 제도도 살펴봐야 했고, 남은 기록을 찾아도 거슬러 올라갈수록 빈 부분이 많더라고요. 조사도 답사도 많이 했습니다.”
2016년부터 자료 조사를 시작했고, 2018년 단편을 발표하면서 ‘설자은’ 시리즈가 시작됐다.
사실 ‘남장여자’라는 일종의 클리셰를 두고 작가는 고민이 많았다. 정세랑은 “그냥 여자로 할까 했지만 전근대 시대에 여성의 ‘이동의 자유’를 풀기가 쉽지 않았다. 설자은을 발해나 일본에도 보내고 싶은데 여성이면 너무 부자연스러웠다”고 말했다.
소설의 신선함은 설자은보다 일찌감치 그가 남장여자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목인곤에서 찾을 수 있다. 망한 나라 백제 출신의 똘똘한 목인곤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설자은과 만나 ‘티키타카’ 유쾌하게 미스터리를 풀어간다. 정세랑은 “목인곤은 조여오는 공기를 풀어주는 역할”이라며 “실제 기록에도 황룡사 9층 목탑이나 불국사 탑을 지을 때 백제 장인을 불렀다고 한다. 그는 아비지나 아사달 같은 백제 장인을 모티브로 해 만든 가상 캐릭터”라고 했다.
설자은과 목인곤은 배에서 발견된 시신, 길쌈대회를 앞두고 부서진 베틀을 망가뜨린 범인, 매잡이가 죽은 이유 등 사건을 밟아간다. 읽다보면 드라마 에피소드로 만들기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전작 <보건교사 안은영>도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그는 “시리즈물이니까 힘을 받아야 계속 낼 수 있다. 한 3권까지 쓰고 영상화를 해보면 좋겠다”며 웃었다.
책 사는 걸 워낙 좋아하는 작가는 이번 시리즈를 쓰면서 “고삐가 살짝 풀렸다”고 말했다. 자료 조사 명목으로 신나서 더 사게 됐다는 것. 그는 “집이 무너질 것같이 방 한가득 책이 있는데 이사할 때마다 짐 옮겨주시는 분들이 너무 싫어한다”며 “요샌 일부 책들은 기부한다”고 했다.
그는 요즘 동시대 작가들의 책을 많이 읽는다. 최근엔 장류진의 소설집 <연수>을 읽었다. 정세랑은 “장류진 작가는 보통 사람들이 잘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함 같은 것을 잘 포착한다. 불쾌함과 기괴함 사이에 특이한 발란스를 가졌다”고 말했다.
역사추리 소설 출간이 의외듯이 정세랑의 MBTI는 의외로 ‘ENTJ’. 그는 외향형이고 직관형이며 사고형이고 계획적이었다. “누가 재미있는 자리가 있으니 가자고 하면 따라나서요. 새로운 경험 해보는 것도 좋아해요. 재봉틀도 배웠고 비즈공예도 배워봤어요. 손재주가 없더라고요. 취미는 잘 하지 않아도 되고, 또 ‘나에게 다른 길은 없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소설과 에세이까지 포함하면 그는 거의 1년에 1편씩 책을 내고 있다. ‘오전 9시~오후 6시’ 직장인의 근무시간처럼 글을 쓴다는 정세랑. 그는 “보통 모니터를 계속 쳐다본다. 고통스러워서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앉기를 반복한다”고 스스로를 묘사했다. 자신의 글쓰기 방식을 ‘주섬주섬’으로 표현했다. “‘와다다’ 쓰지 않고, 주섬주섬 써요.”
그에게는 ‘글항아리’가 여러 개 있다. “머릿속에 항아리가 여러 개 있어요. 지금은 4~5개 됩니다. 발효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요. 장을 담그듯이요.” <보건교사 안은영> 시즌 2도 ‘항아리’ 중 하나다.
이번 책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전작과 비교하면 대중적인 편이다. “동시대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하고 싶어서 쓰는 소설도 있고, 정말 즐거움 자체에 맞춘 소설도 있는데, ‘설자은’은 후자에 가까워요. 독자들이 머릿속으로 통일신라에 가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임지선 기자 visi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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