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당’이 어쩌다 ‘트럼프당’이 됐나… 공화당 ‘파괴 정치’의 역사 [워싱턴 아나토미]
대중의 기득권 정치 회의·불신 땔감 삼아
비타협 강경 노선으로 ‘어그로’ 끈 극우파
저학력 백인 남성 구애 전략 유효 기간은
편집자주
‘그레이 아나토미’는 한국에도 팬이 많은 미국 드라마입니다. 외과의사가 주인공이어서 제목에 ‘해부학’이 들어가고 무대는 병원이죠. 여성·인종·성소수자 차별, 가정 폭력 등 사회 병폐 이슈가 극에 등장하고, 바로 이런 요인이 장수 비결로 꼽힙니다. 워싱턴 특파원이 3주에 한 번, 미국의 몸속을 들여다봅니다.
지난달 3일(현지시간) 미국 하원에서 설마설마하던 일이 벌어졌다. 대통령과 부통령에 이어 권력 서열 3위인 연방 하원의장이 하원의원들의 표결로 쫓겨났다. 234년 미국 의회 역사상 처음 벌어진 일이다.
쫓겨난 케빈 매카시 전 하원의장(9선)의 정치적 덩치에 견주면 해임을 주도한 맷 게이츠 의원(4선)은 경량급이다. 두 사람은 공화당 소속이어서 매카시 전 의장은 집안에서 배신을 당한 꼴이었다. 이들은 모두 강경파로 분류되지만, 게이츠 의원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더 가깝고 더 강경하다. 초강경파가 덜 강경파를 몰아낸 ‘막장극’은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다. 정치를 극단의 갈등으로 몰고 가는 공화당의 ‘파괴 정치’가 곪아 터진 결과다.
주류 온건파 굴욕
올해 초 매카시 전 의장이 선출될 때도 소수 강경파는 그의 하원의장 선출안을 15번이나 투표에 부치며 그를 조련하려 했다. 극우 성향 강경파가 보기에 타협의 정치를 명분으로 민주당에 걸핏하면 양보하는 매카시 전 의장은 믿기 힘든 사람이었다. 의장이 해임될 가능성이 상존했던 셈이다.
여파는 컸다. 의장 자리가 공석이 되자마자 미국의 중동 맹방인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로부터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 내년도 미국 행정부 예산안 등 시급한 안건이 많았지만 하원의장 없는 의회는 속수무책이었다.
강경파는 굽히지 않았다. 다수파인 중도온건파는 당내 하원 서열 2, 3위인 원내대표와 원내총무를 차기 하원의장으로 밀었지만, 강경파가 비토했다. 공화당은 하원 다수당이지만 원내 과반(217석)을 겨우 4석 넘는다. 당내에서 5명만 이탈해도 인사 안건 의결 정족수(과반 이상의 찬성)를 단독으로 채울 수 없다. 꼬리, 즉 극소수 강경파가 몸통을 흔들 수 있는 구조라는 뜻이다.
‘치킨 게임’의 승자는 강경파였다. 급박한 시기에 안에서 치고받느라 의장 후보 선출에 잇달아 실패하면 공화당을 함께 망하는 길로 인도할까 봐 온건파는 불안해했다. 의회 파행의 주범으로 낙인찍히느니 강경파에 양보하는 굴욕을 감내하기로 했다. 이에 처음 맡은 주요 보직이 하원의장일 정도로 무명에 가까운 마이크 존슨 의원(4선)이 하원의장에 올랐다. 그는 지난 대선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트럼프 전 대통령을 이긴 것을 인정하지 않는 초강경 성향이다.
“갈아엎자” 데자뷔
미국 정치에서 서열은 돈과 밀접하다. 당이 쓸 선거 자금을 얼마나 많이 벌어 오는지가 정치인의 위치를 좌우한다. 매카시 전 의장의 당내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그가 모금한 후원금이 지난해 중간선거 기간에만 약 3억5,000만 달러(약 4,669억 원) 규모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모금액 순위에서 그를 잇는 스티브 스컬리스 원내대표가 10년간 모금한 액수(약 1억7,000만 달러)의 두 배다.
공화당 강경파가 강경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구조에서 비교적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당내 선거 자금에만 의존하지 않고 불특정 유권자들에게 직접 모금하는 것은 공화당 강경파의 방식이다. 소란을 많이 일으킬수록 모금액이 늘어난다. 다음 장면이 이를 보여 준다.
매카시 전 의장 해임 표결 직전 본회의장 토론 연단에서 그의 측근인 개럿 그레이브스 의원이 휴대폰을 들었다. “내 전화기가 문자 메시지를 계속 보내네요. ‘돈 좀 주세요. 내가 해임안을 제출했어요.’” 게이츠 의원이 해임안 발의 직후 후원 요구 메시지를 돌린 것을 조롱한 것이다. 그레이브스 의원은 “공적 입법 활동의 목적이 모금이냐. 역겹다”고 일갈했다. 게이츠 의원은 “(정치자금을 받기 위해) 로비스트와 이익단체들에 굽신대는 사람들로부터 설교를 들을 생각이 없다”며 “애국자들에게 후원을 통해 이 싸움에 동참하라고 독려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대표적인 이들의 조력자가 트럼프 전 대통령의 책사였던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다. 그는 배후에서 정치적 분란을 조장해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고,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집권 기반을 닦는다. 흥분한 지지자들은 그가 밀어주는 친(親)트럼프 정치인에게 후원금을 보낸다. 미국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하원의장 해임 사태에도 배넌이 개입했다. 배넌은 해임 이튿날 게이츠 의원과 또 다른 강경파 낸시 메이스 의원을 자신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워룸’에 출연시켜 “영웅들”이라고 소개하면서 그들에게 후원금을 보내도록 청취자들을 유도했다.
분노를 활용한 공화당 강경파의 선거 전략은 통하는 경우가 많았다. 1994년 빌 클린턴 행정부의 첫 중간선거에서 뉴트 깅그리치 당시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는 ‘아니면 말고’식 추문 유포와 고발로 민주당을 부패한 기득권 집단으로 몰아 선거에서 대승했고, 이듬해 하원의장에 올랐다.
공화당에 1948년 이래 최대 승리를 안긴 2010년 중간선거 당시 보수 유권자 정치 운동 ‘티파티(TEA Party)’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당 정권인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증세 정책,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월가 엘리트 집단에 대한 세금 지원을 비판해 보수층을 결집시켰다. ‘티’는 ‘세금은 이미 충분히 내고 있다(Taxed Enough Already)’의 약자다.
공화당 극우 의원 20여 명으로 구성된 '프리덤 코커스'도 ‘갈아엎자’를 표방한다. 2015년 초 출범한 이 모임의 극단적 감세 정책과 비타협 강경 노선은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을 땔감으로 쓴다. 게이츠 의원이 이 모임 소속이다.
“미국 주인은 백인”
공화당의 구심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다. ‘파괴’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집권 전략이다. 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연대(KAGC) 대표는 “워싱턴 정치가 계속 망가져야 승산이 더 커진다는 게 트럼프의 셈법”이라고 말했다.
공화당이 강경파에 휘둘리는 것이 트럼프 전 대통령 때문만은 아니다. 노먼 오른스타인 미국기업연구소(AEI) 명예 학자는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트럼프는 그가 대선 후보로 등장하기 전 20여 년간 차츰 부상한 허무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정치의 논리적 확장”이라고 말했다. 트럼프식 분열의 정치가 싹틀 토양이 이미 준비돼 있었다는 뜻이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을 이끈 것은 스스로를 박탈당한 세력이라고 느낀 저학력 백인 남성들이었다. 백인 저학력 노동자에 대한 공화당의 구애가 본격화한 것은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남부 전략’을 채택한 1960년대부터였다. 남부 전략은 흑인 인권 신장에 따른 남부 백인 사회의 불안과 불만을 대변해 민주당 표밭이던 남부의 표심을 빼앗겠다는 구상이었다.
1860년 대통령에 당선된 에이브러햄 링컨이 노예제 전면 폐지 약속을 지킨 뒤 ‘링컨의 정당’이라 불리던 공화당이 한 세기 만에 백인우월주의, 기독교 근본주의, 반(反)이민주의를 표방하는 정반대 정당으로 변신한 것이다.
공화당의 지지 기반은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다. 1988년 이후 8번의 대선에서 공화당의 총득표수가 민주당을 앞선 것은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재선 도전 때인 2004년 한 번뿐이었다. 미국 컬럼비아대 저널리즘 스쿨 학장인 젤라니 콥이 미국 시사교양지 ‘뉴요커’에 쓴 글을 보면, 2007년엔 백인 기독교도가 다수인 미국 주(州)가 39개였지만 지금은 절반도 안 된다. 1996년 85%였던 백인 유권자 비율은 2018년 67%까지 떨어졌다.
이에 공화당은 집권 전략을 바꿨다. 다수에 매달릴 수 없었다. 혐오와 편 가르기를 조장하고 소수계의 투표율을 낮추는 방식으로 집권을 노린다. 상원과 선거인단 등 인종 비율의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낡은 제도도 십분 활용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규범 무시와 미국 유권자의 정치 불신은 미국의 존립을 위협한다. 내년 대선이 고비다. 바네사 윌리엄슨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은 “공화당 유권자의 3분의 2가 여전히 바이든 대통령의 지난 대선 승리를 부인한다”며 “내년 대선에서 공화당이 패배하면 공화당원들이 수용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말했다. 대선 결과에 불복한 유권자들이 워싱턴 국회의사당에 난입해 폭동을 일으킨 2021년 1·6 사태가 재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워싱턴= 권경성 특파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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