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모험’으로 떠난 사나이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도…순수한 도전정신 기억되길
가을빛이 완연했던 지난달 중순 금정산 동문 아래 광장에 부산과 서울의 산악인들이 모였다. ‘부산 산악인’ 서성호와 ‘서울 산악인’ 김창호를 추모하고자 모인 이들이었다. 부경대 출신의 서성호는 10년 전인 2013년 서울시립대 출신의 김창호와 함께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고 하산하는 길에 유명을 달리했다. 김창호도 5년 전 네팔 히말라야에서 등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 두 사람은 부산산악연맹의 ‘다이내믹 부산 희망 원정대’가 2006년부터 2011년에 걸쳐 히말라야 8000m봉 14좌 완등의 위업을 이루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서성호가 원정대의 첫 번째 8000m인 에베레스트를 비롯해 12개 봉, 김창호가 에베레스트를 제외한 나머지 거봉 등정에 참여했다. 두 사람은 이 과정에서 11개의 8000m 봉을 함께 오른 영혼의 동반자였다.
이날 금정산에서 두 산악인의 사망 10주기와 5주기를 맞아 두 지역 산악인은 ‘고 김창호·서성호 합동 추모 산행’을 열었다. 금정산은 서성호가 대학 입학 후 부경대 산악회에 가입한 뒤 처음 만나 산을 배우고 산과 사랑에 빠진 곳이다. 이들은 금정산 주 능선을 거쳐 서성호가 바위를 배웠던 무명암 아래 추모 동판을 찾아 한 잔 술을 올리고 험난한 산을 함께 오르내리며 산악 활동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함께했던 두 사람을 기렸다.
서성호는 부산을 대표하는 고산 등반가였다. 대학 입학 후 고산 등반에 뛰어든 뒤 빠르게 단연 두각을 드러내며 원정대의 막내로 ‘희망 원정대’에 참여했다. 1998년 대학 입학 후 2004년 처음 해외 고산인 북미 최고봉 데날리 원정에 나서며 실력을 발휘했다. 한국청소년오지탐사대와 푸모리 원정대에 이어 본격적인 고산 등반에 뛰어든 지 2년 만에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밟았다. 이후 한 해를 건너뛰고도 6년 만에 12개의 8000m를 올랐다. 하지만 그는 K2와 브로드피크 2개의 거봉만 남겨두고도 완등에 대한 욕심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김창호와 함께 한 번 올랐던 에베레스트에 다시 오르며 무산소 등정에 성공한 뒤 세상을 떠났다.
영국의 등반가 프랭크 스마이드는 죽음은 흔히 등산가의 곁에 있으며 등산가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산의 환상’에서 “자신과 죽음의 무게를 저울의 양쪽에다 달아보려는 욕망이 인간에게는 본능적인데, 그러다가 언젠가는 때가 되면 너무나 오랫동안 참을성 있게 저울을 들고 있던 운명이 죽음 쪽으로 그것을 기울어지게 한다”고 적었다. 일부러 죽음을 찾아가는 등반가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 운명을 피해 갈 수 있는 등반가도 없다. 등반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의 문턱을 밟았다가 되돌아서기도 하는데 끝내는 그 문턱을 넘어서고 마는 것이다. 서성호에게 두 번째 오른 에베레스트가 그런 때였다.
10년 전의 봄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만난 선배 산악인이 서성호에게 “K2와 브로드피크만 오르면 14봉 완등인데 에베레스트 무산소를 택했느냐?”고 묻자 그는 “14봉 완등은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어떤 등반을 해야 하나 고민 끝에 세계 최고봉 무산소 등정으로 제 한계를 극복하는 길을 택했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는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지만 무사히 돌아오지는 못했다. 안전하고 쉬운 등반을 위해 산소를 사용하는 대신 무산소로 한계를 넘고 8000m 위 ‘신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모험으로의 길을 택한 결과였다.
에베레스트를 처음 무산소로 오른 라인홀드 메스너는 “인공산소를 사용하면서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것은 8000m급 산을 6000m급으로 낮추는 행위다”고 일침을 가했다. 에베레스트 초등이 이뤄지기 전에 이미 프랭크 스마이드는 앞의 책 ‘산의 환상’에서 “많은 등산가가 등산은 모험으로 남아 있어야 하므로, 인공산소처럼 인위적인 요소는 아무것도 동원되지 말아야 하고, 만일 그것이 없이는 등반이 불가능할 때는 그 등반은 시도하지 않는 편이 더 좋다고 이야기한다”고 무산소 등반의 가치를 전파했다.
스마이드는 산소를 배제함으로써 등반은 자연스러운 모험으로 남아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의 믿음대로 서성호는 무산소 등정에 목숨을 걸며 자신의 등반을 순수한 모험의 영역에 남겨두었다. 그런데 그가 산악 활동에 뛰어들었던 시기와 비슷한 나이의 젊은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지금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그가 했던 등반과 같은 순수한 모험과는 멀어진다. 대학 산악부는 명맥을 잇기 어려울 지경이고 순수한 산악활동으로 전위적인 등반도 드물어진다. 꼭 산이 아니더라도 모험의 순수성을 잊어간다. 그가 10년 전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모험’을 계속했다면 달라졌을까. 모험과는 멀어지는 사회에서 산악인 서성호의 10주기를 맞아 순수한 등반 활동과 모험을 찾아 떠났던 그가 더 오래, 널리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진규 편집국 부국장 겸 걷고싶은부산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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