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제레~ 미제레~” 프랑스어로 부르는 ‘흥보가’도 있다
“미제레 미제레 테리블 미제레(Misère Misère terrible Misère), 가난이야 가난이야 원수년의 가난이야….” 최근 서울 성북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서 만난 마포 로르(Mafo Laure·39)씨는 ‘흥보가’의 ‘가난 타령’ 대목을 열창 중이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로르씨의 입에선 같은 판소리 구절이 프랑스어와 한국어로 연이어 나왔다.
로르씨는 7일 서울 남산국악당 ‘제1회 월드판소리 페스티벌’에서 가난 타령의 한-프랑스어 동시통역 무대를 선보인다. 이 축제에선 7·8일 이틀간 고수 20명과 소리꾼 60명이 총 ‘20시간’ 릴레이 판소리 공연을 오전 11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무료로 펼친다. 판소리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국가무형문화재로 등재된 지 올해로 ‘20주년’이 된 걸 기념하는 행사. 출연자는 판소리 전공자뿐 아니라 소리를 좋아하는 일반인까지 오디션을 거쳐 선발했다. 한글과컴퓨터그룹 김상철 회장 등 우리 소리를 사랑하는 이들의 민간 후원으로만 진행되는 이번 축제에선 댕기와 전통 부채 만들기 체험, 민혜성·정수인·박인혜·김희선 등 유명 소리꾼들에게 직접 판소리에 대해 배워볼 수 있는 무료 워크숍 등 다채로운 행사도 함께 열린다.
로르씨는 한예종 2년 후배이자 시각장애인인 최예나(19)양과 함께 축제를 대표하는 10인에 들었다. 외국인, 장애인 등 ‘문화의 차이를 넘는 소리의 교감’이란 축제의 주제를 잘 표현하는 얼굴로 나서게 된 것. 카메룬 출신인 로르씨는 본래 프랑스 대학에서 회계 감사를 전공했고 2015년 삼성전자 프랑스 지사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그 해 한국어를 배우러 간 한국문화원에서 민혜성 명창(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흥보가’ 이수자)의 무대를 보고 판소리 사랑에 빠졌다. 2년 뒤 퇴사해 한예종에 입학했고, 현재는 교내 판소리 전공생 중 유일한 외국인이 됐다.
공연 곡들은 판소리 다섯 마당 중 참가자가 원하는 대목을 20분 분량으로 골라 펼친다. 최예나양은 “제 눈이 번쩍 뜨이고 싶은 마음”을 담아 ‘심청가’의 ‘눈 뜨는 대목’을 골랐다. 로르씨는 “외국인들의 판소리 공연 접근성을 높이고 싶은 마음”에서 ‘프랑스어 가난 타령’을 골랐다. 이미 영어, 불어, 일본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판소리 가사집이 많지만, “국악 공연에 제대로 쓰이지 못하거나, 판소리 공연 자체도 외국인에게 잘 노출되지 않는 게 안타까웠다”고 했다.
축제는 유튜브로도 생중계한다. 로르씨는 “한국어를 못 할 때 들은 소리도 깊은 감동을 줬지만, 뜻을 알고 들으니 그 깊이가 더해지더라”며 “한국어와 음절이 다른 프랑스어에 한국의 소리를 싣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분명 외국 친구들에게 판소리 매력을 알릴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외국인 판소리 유학생 지원 사업을 펼치는 세계판소리협회 이사장이자 이번 축제를 기획한 채수정 한예종 교수는 “유망한 소리꾼들과 언젠가는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다양한 문화권과 함께 즐기는 이 축제를 펼치는 게 최종 목표”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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