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정권은 왜 '사법부 암흑기'로 얼룩졌나
헌정사상 초유의 '사법부 수장' 잔혹사
정치적 이해에 매몰된 '5공 판사' 청산 실패
신군부 '오만·불통'이 낳은 '사법부 비극'
[아이뉴스24 최기철 기자] "투표결과를 말씀드립니다. 총 투표수 295표 중 가 141표, 부 6표, 기권 134표, 무효 14표로서 대법원장 정기승 임명동의의 건은 헌법 제49조의 규정에 의해서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제13대 국회는 1988년 7월 2일 오후 2시 본회의에서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을 부결했다. 헌정 사상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첫 사례였다.
정 후보자(당시 대법원 판사, 현 대법관) 낙마는 예견된 것이었다. 전임 김용철 대법원장이 '5공 판사 퇴임'을 외치는 법관들의 '제2차 사법파동'으로 물러난 터였다. 그런데도 노태우 대통령은 정 후보자를 대법원장 후보자로 지명했다. '사법부 독립'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묵살한 것이다.
◇노태우 "새 대법원장 선정, 개혁의지 시험대"
노태우 청와대에서는 정 후보자 지명 발표 전 "새 대법원장 선정은 6공화국의 확실한 개혁의지를 실천해 보이는 시험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직 대법원장과 대한변호사협회장들을 청와대로 불러 이틀간 오찬을 함께 하며 법조계 여론을 수렴하는 듯 했다. 이들은 노 대통령에게 "신임 대법원장은 전 법조계 인사 중 신망이 큰 인사를 선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결론은 정 반대였다.
그 저변에는 '전두환 5공 정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정 후보자는 '5공 시절'인 1984년 서울형사지법원장으로 근무하면서 여러 시국사건 재판에 개입했다. 그 공로로 이듬해 대법원 판사로 취임했다.
당시 대법원장 후보로 정 후보자와 함께 김덕주 전 대법원 판사, 이병호 전 서울변호사회장, 오성환 전 대법원 판사, 이회창 전 대법원 판사, 이정우 법원행정처장(대법원 판사) 등이 거론됐다. 그러나 김덕주(56)·이회창(54)·오성환(55) 전 대법원 판사는 어리다는 이유로, 이병호 전 회장은 대법관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최종 후보군에서 빠졌다. 이일규·김윤행 두 전 대법원 판사도 거론됐으나 두 사람 모두 70세 정년을 2년 앞둔 터라 제외됐다. 결국 정 후보자만 남았다.
◇"사법부를 '인권탄압기구'로 타락시킨 후보자"
'정기승 대법원장설'이 청와대에서 흘러나오자 여당을 제외한 정치권과 법조계가가 즉각 반발했다. 평민당과 민주당 등 야당에서 연이어 반대성명이 나왔다. 대한변협도 긴급 이사회를 소집해 반대성명을 냈다. 재경 변호사 125명은 반대 서명운동까지 나섰다. 이들은 "정 대법관이 제5공화국 정권의 가장 혹독한 탄압시기에 대법원 판사를 지내면서 사법부를 인권탄압기구로 타락시키는데 주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성토했다.
급기야 사법연수생 18, 19기 까지 나섰다. 사법연수생들이 법조계 문제와 관련해 집단 움직임을 표출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연수생 181명은 '사법부의 독립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성명을 내고 "사법부 수장인 대법원장 선출이 국민과 법조인 뜻이 아니라 정당간 정치적 거래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는 의혹은 사법부의 독립과 민주화가 이 나라 민주주의의 요체가 된다는 점에서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분개했다.
◇힘으로만 밀어붙인 군사정권의 오만·불통
그러나 노 대통령은 밀어붙였고, 결과는 참담했다. 정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은 여소야대(여당 125석, 야권 174석) 정국 구조 아래 첫 표대결로, 노 대통령과 국회간 관계설정의 갈림길이었다. 정 후보자의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당일 열린 민주정의당 의원총회에서 윤길중 당대표와 지도부가 사의를 표명했다. 노 대통령과 13대 국회 간 저울추는 야권주도 국회로 급격히 기울었다. 여소야대 구도를 가볍게 보고 법조계를 비롯한 국민여론까지 무시한, 불통과 오만의 결과였다. 5공에 이어 태어나 힘으로만 밀어붙인, 군사정권의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이 과정을 지켜본 국민 여론도 싸늘해져 갔다. 노태우 대통령 취임(1988년 2월 25일) 넉달만의 일이었다.
노 대통령은 '정기승 낙마' 이틀만에 이일규 전 대법원 판사를 새 대법원장 후보자로 지명했다. 당시 68세로, 70세 정년 문제가 있었지만 덮어 뒀다. 그때 법무부 장관이었던 정해창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노 대통령이 '후임자를 하루빨리 지명해서 대법원장 공석 사태가 장기화 하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야권과 국민 불만을 서둘러 진화해야 한다는 결단도 한 배경이었다.
이 전 대법원 판사는 '대꼬챙이'라는 별명이 붙은, 원칙과 소신의 아이콘이었다. 다만 그 역시 박정희 정권(4공화국) 시절 대법원 판사를 지냈다. 그러나 이 전 대법원 판사는 스스로를 '유신판사'라고 자조하며 퇴임할 때까지 시국·공안사건에서 소신을 지켰다. 앞서 1975년 피고인 전원 유죄로 확정된 '이민혁명당 사건'(인혁당 재건위 및 민청학련 사건)에서 대법원 판사 13명 중 유일하게 반대의견을 냈다. 그런만큼 야권에서도 이론이 없었다. 이 후보자는 지명 보름쯤 뒤인 7월 20일 제10대 대법원장에 취임했다.
◇2년 5개월간 이어진 '이일규 사법부' 체제
'이일규 사법부 체제'는 2년 5개월 동안 무리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 전 대법원장 정년퇴임을 앞두고 대법원장 인선이 또 문제가 됐다. 1990년 12월 1일 대한변협은 박승서 협회장 명의로 '대법원장 임명에 관한 요망서'를 보내고 대법원장 인선 기준 등에 대한 재야법조계 의견 표명 기회를 요청했다.
변협은 요망서에서 "후임 대법원장은 사법권 독립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으로 민주적 시민의식을 갖고 전 법조생활을 통해 공·사간에 다른 사람의 지탄을 받지 않았고 정당적 색채가 없는 중립적 의식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며 "탁월한 인격과 소명의식을 통해 모든 법조인의 존경를 받을만 한 인물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야법조계 요망도 그러했지만 무엇보다 국민이 거는 신임 대법원장에 대한 기대는 매우 컸다. 이 대법원장 재임간 사법부 쇄신이 없었던 바는 아니었지만 국민 눈높이에는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현직 부장판사가 대전 모 룸살롱에서 현직 의원과 검사, 조직폭력배와 어울려 술판을 벌인 사건이 대법원장 인선 직전에 터지면서 사법부에 대한 신뢰는 나락으로 떨어져 있었다.
당시 청와대 인사 테이블 위에 올라 있던 최종 후보군은 김덕주 대법관, 이회창 대법관, 최재호 대법관 등 세 사람이었다. 이 중 이 대법관은 그 전 해 실시된 동해시와 영등포을 국회의원 재선거가 부정·금품·타락선거로 얼룩지자 맡고 있던 중앙선거관리위원장직에서 사퇴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노 대통령은 그가 껄끄러웠다. 최 대법관은 출신이 문제였다. 경북 고령 출신으로, 노 대통과 당시 박준규 국회의장이 모두 대구 출신이었기 때문에 최 대법관이 대법원장이 된다면 입법-사법-행정부 수장이 모두 TK로 채워진다는 점에서 부정적 평가가 많았다.
◇대법원장 후보 된 '5공 부역' 판사
그해 12월 7일 최종후보는 김 대법관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그에게는 결정적 흠결이 있었다. 12·12 군사 반란, 5.17 쿠데타 이후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의 신군부에 부역한 이력이다. 그는 1980년 법원행정처 차장 시절 전두환 정권 직후 정치쇄신위원회위원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사법부 내 전두환 정권에 비판 적인 법관과 일반직에 대한 숙청 작업을 주도했다. 10억대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재판을 받던 전두환 처남 이창석씨 사건 상고심 주심을 맡아 그를 보석으로 풀어준 법관도 김 대법관이었다. 박정희 정권 치하인 1979년 서울민사지법원장 시절에는 야당 지도자였던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의 '직무집행 정지사건' 재판에도 개입했다.
당시 한 법관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회가 여대야소의 상황으로 바뀌었다 하더라도 정기승 대법관 임명동의안 부결파동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법조계의 광범위환 의견수렴 절차 없이, 그것도 주로 검찰 출신인 대통령 측근 몇몇 인사들의 의견을 기초로 사법부 수장을 인선하는 것은 문제"라고 개탄했다. 그때 노 대통령을 보좌한 대통령실 비서실장은 '정기승 낙마 사태'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정해창 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이었다.
신군부 2기 정권 안정을 위해 사법부 장악이 절실했던 노 대통령으로서는 신군부와 손발을 맞춰 온 김 대법관이 반드시 필요했다. 노 대통령은 김덕주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을 국회로 보냈다. 야권에서는 "김씨를 굳이 대법원장으로 지명한 것은 현 정권이 사법부마저 장악해 독재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장기집권을 획책하기 위한 노골적인 음모"라며 비판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정기승 낙마사태' 때와는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해 2월 '민정-민주-공화' 3당 합당으로 국회는 '여대야소'로 재편이 끝난 상황이었다.
◇사법권 독립 무시한 '정치적 이해 산물'
1990년 12월10일. 박준규 국회의장은 국회 본회의에서 '대법원장후보자 김덕주에 대한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가결을 선포했다. 총 투표자 수 263표 중 가 190표, 부 70표, 기권 3표의 결과였다.
8일 후 김덕주 대법원장은 국회 인사에서 "대법원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민주화된 사법부, 국민에게 봉사하는 사법부, 국민들이 신뢰하고 존경하는 사법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같은 달 21일 취임식에선 "사법권의 독립은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계층이나 집단으로부터도 독립하는 것을 뜻한다. 사법권의 독립을 가로막고 법치주의의 확립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온힘을 다 바치겠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김덕주 대법원장은 오래가지 못했다. 변호사 시절이던 1986~1988년 경기 용인군 수지면과 모현면 일대 임야와 서울 서초구 원지동 논밭 등 3~5만여평을 미성년이었던 아들과 자신 이름으로 매입해 보유한 것이 드러나 투기의혹에 휩싸이면서다. 김 대법원장은 1980년 대법관에 임명된 뒤 6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가 2년간 변호사로 활동한 뒤 1988년 7월 대법관으로 재임용됐다.
이 사실은 1993년 9월 7일 첫 고위공직자 재산공개에서 드러났다. 고위공직자 재산공개는 그해 2월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의 핵심 정책이었다. 김 대법원장은 결국 재산공개 3일만인 9월 10일 자진 사퇴했다. 취임 2년 10개월여 만이었다. 불통과 밀실인사로 얼룩졌던 노태우 정부의 대법원장 인사는 헌정사상 초유의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 거부와 역시 헌정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법원장이 부동산투기 의혹으로 중도 사퇴하는 비극을 낳았다.
/최기철 기자(lawch@inews24.com)Copyright © 아이뉴스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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