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인사이트] 비단길? 도자기와 소주의 길 !

2023. 11. 6. 00:2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전영민 롯데벤처스 대표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1258년, 그들이 몰려왔다. 비단길로 중동까지 달려온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와 몇만 명에 불과한 몽골군은 인구 100만의 거대 도시 바그다드를 잔인하게 파괴했다. 도살자란 별명을 가진 훌라구가 그 와중에도 귀하게 모셔간 존재가 있었으니 엔지니어다. 창시자인 칭기즈칸부터 엔지니어라면 인종과 출신을 불문하고 극진하게 우대했다. 애, 노인 탈탈 털어도 인구 100만에 불과한 몽골이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바그다드엔 연금술사라는 별난 엔지니어들이 있었는데 몽골은 끓는점의 차이를 이용해서 액체를 성분별로 추출하는 그들의 기술에 콱 꽂혔다. 음주가 금지된 무슬림은 그 기술로 향수를 추출하고 있었다. 몽골인도 대단한 술꾼들이었지만 초원엔 재료가 말젖뿐이라 그걸로 마유주를 만들어 마셨다. 그게 걸쭉한 데다 도수까지 낮으니까 쉽게 상해서 말에 싣고 다니기에 엄청 불편했는데, 그 기술로 도수를 올리면 기병에겐 딱이었다. 전 세계 술꾼들이 환호할 바그다드의 그 기술은 비단길로 빠르게 전파됐다. 아랍어인 ‘알-코올’을 추출해내는 그 기술은 길의 동쪽 끝 고려까지 왔고 불에 태운 술, 소주(燒酒)라 불렸다. 그 시절 일본을 정벌하겠다고 몽골군이 잠시 주둔했던 평양과 안동이 소주로 유명해진 연원이다.

독일 작센의 제후가 뿔이 났다. 도자기 때문이었다. 금속으로 만든 그릇은 무거운 데다 따뜻한 음식을 담는 데 젬병이었다. 그런데 동방에서 온 자기는 가볍고 아름다운 그림이 들어가 있어 부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제후가 몇 점 장만하면서 자랑을 하자 어중이떠중이 귀족들까지 경쟁적으로 구매하는 게 아닌가! 엄청난 국부 유출이 따라왔다. 이러다 저놈의 도자기 때문에 나라 망하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고심 끝에 납으로 금을 만든다고 허풍을 치는 뵈트거라는 연금술사를 잡아들였고 국부를 채울 금을 만들기 전엔 못 나간다고 선언한 뒤 연구실에 가둬 버렸다. 황당해진 그 연금술사, 금을 만들어낼 수는 없고 두뇌 회전을 백 배로 가속해서 백자를 대신하는 ‘경질자기(마이센)’ 제조법을 개발해낸다. 그 기술은 유럽 전역으로 전파됐고 도자기 산업이 빠르게 발전했다.

반면, 우리는 엔지니어를 천대하신 선조들 덕분에 청자와 백자의 엄청난 기술이 흩어졌고 유럽 자기를 명품으로 모시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사실 비단길엔 어폐가 있다. 비단 제조법은 오래전부터 전 세계에 알려져 있었다. 그 길은 뵈트거 이전엔 도자기가 유통되던 길이었고 동서의 지혜가 공유되는 번영의 길이었다. 종이와 화약, 제철, 금속세공과 온갖 기술들이 그 길을 통해 나눠졌다. 그 잠재력을 아는 몽골은 그 길의 상인들을 건드리는 놈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용서치 않았다. 유라시아가 다른 대륙보다 빠르게 발전한 비결이다. 그런 나눔의 통로를, 힘을 이기적으로 투사하는 길로 접근하는 어떤 나라가 있는데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평생을 연금술 연구로 보내다 틈이 나면 달을 쳐다보며 “저 녀석은 왜 안 떨어지고 지구 주변을 하염없이 돌고 있는지”를 궁금해하던 사람이 있었다. 정부는 온갖 금속을 주물럭대고 있던 그를 조폐국장으로 임명했다. 은화의 테두리를 깎아내는 얌체짓을 막으라는 거다. 그 연금술사, 테두리에 톱니를 판 동전을 만들어 문제를 한 방에 해결했고, 25년 동안 조폐국장 자리에 앉아 영국의 화폐 체계를 발전시켜 제국의 토대를 만들었다. 짬을 내서 온도계도 만들어낸 그분, 이름이 아마 뉴턴이지?

연금술,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을 수밖에. 전혀 보탬이 안 될 것 같은 지식인들의 우스운 놀음마저 인류의 삶을 크게 바꿨는데 현대의 과학기술은 말해 무엇하랴! 지금 노벨과학상 한·일전 전적은 25 대 빵(0)! 상황이 이러니 외환위기 때도 연구개발(R&D) 예산만은 삭감하지 않았다. 1966년 베트남전 파병을 4만 명으로 늘려주는 대가로 미국 존슨 대통령에게서 받아낸 게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다. 몽골처럼 자원이 없는 나라, 선배 세대들은 남의 전쟁에서 피 흘리고 중동의 사막 공사판에서 땀 흘리며 벌어온 그 달러를 당장은 보탬이 안 되는 과학기술에 먼저 투자했었다. 그런 결단이 선진 한국의 출발점이었고, 여전히 갈 길은 먼데 씁쓸하다. 오늘은 ‘도자기’에 든 안동 ‘소주’라도 꺼내 한잔해야겠다.

클래식과 미술의 모든 것 '아르떼'에서 확인하세요
한국경제·모바일한경·WSJ 구독신청하기

Copyright © 한국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