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피크제… 위기일까 기회일까[정경아의 퇴직생활백서]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2023. 11. 5.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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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피크제, 퇴직 앞두고 서글퍼지지만
재충전하고 새 시도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다음 여정 위한 중간기착지로 잘 활용하면
두 번째 항로선 인생의 진짜 피크 맞을 것
일러스트레이션 갈승은 atg1012@donga.com
일과를 마치고 여유 있게 휴대전화를 보았다. 추천 기사를 읽고 SNS 대화방을 둘러보는데 눈에 띄는 얼굴이 있었다.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선배였다. 줄곧 프로필 이미지가 하늘이었는데, 단풍 가득한 산을 배경으로 찍은 모습이 궁금해져 메시지를 보냈다.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잘 지내요? 선배 사진 멋져요.’ 나의 연락으로 선배를 만난 자리에서 선배와 나는 서로의 상황에 놀라기부터 했다. 선배는 안 보던 사이 임금피크제에 들어갔다고 했다. 회사를 떠날 것인지, 남아 있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기 오래전부터 선배는 고민이 컸다고 말했다. 퇴직하려니 회사 밖 세상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고, 임금피크제에 들어가려니 회사 안에서 버텨낼 용기가 없어, 어느 쪽도 편치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 이처럼 힘든 순간은 처음이었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괜찮아졌어.” 무엇이 괜찮아졌다는 말일까. 먼저 어색한 분위기를 깬 사람은 선배였다. 선배는 임금피크제를 결정했던 당시의 상황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몇 년 전 가을, 선배가 다니는 회사의 임원 인사가 끝나고 며칠 뒤 인사 부서로부터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빨리 면담이 이루어져 당황했다고 말했다. 돌아가면서 자신을 만나러 오는 사람이 바뀌는 것도, 충분한 시간적 여유 없이 재촉하는 듯한 모양새도 모두 짐스러웠다고 했다. 최초 면담부터 시작해서 최종 결정을 하기까지의 심정을, 선배는 한마디로 참담했다고 표현했다. 얘기만으로도 당시의 침통한 분위기가 전해져, 있는 장소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선배는 회사에 잔류하기로 한 이후가 더 힘들었다고 말했다. 새로운 계약서에 사인하고 가장 먼저 벌어진 일은 낯선 자리로의 이동이었는데, 발령 내용을 사내 게시판에서 확인하는 순간 억장이 무너졌다고 했다. 누가 봐도 지난 직급과 맞지 않는 자리. 중심에서 멀어진 자리로 이동하게 된 자신이 초라하게 여겨졌고, 사람들이 자신을 어찌 볼까 두려워 숨고 싶었다고 그때 심경을 묘사했다. 그렇지 않아도 보란 듯이 회사를 떠나지 못하는 스스로가 처량하게 느껴졌기에 더 큰 상처로 다가왔다고 했다. 선배를 향한 동료들의 관심이 그리 크지 않았을 텐데, 이후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심한 우울감에 시달렸다는 선배가 마냥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 마음이 오죽했으랴. 그제야 내가 선배에게 메시지를 보냈을 때, 실례지만 누구시냐고 되물었던 이유가 짐작되었다. 선배의 휴대전화 속에서 지나간 사람들의 연락처가 모두 사라진 게 확실했다.

선배는 목이 탔는지, 중간에 음료를 들이켰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선배는 임금피크제 이후의 시간을 자신과의 싸움에 빗대었다. 출근 자체가 고역이었고 접하는 모든 상황이 힘겨웠다고 말했다. 특히 한참 후배를 상사로 모시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불편하기는 피차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될 수 있는 대로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 더 열심히 일했다는데 내 마음까지 저려 왔다. 하루하루 괴로웠을 선배가 다시금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까. 이제 선배는 자신의 존재가 회사에서 완전히 잊힌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요사이 들어온 신입사원은 자신에게 일절 관심도 없다며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시간이 지나 조금은 무뎌진 듯 보여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선배와 헤어지고 돌아오는데 가을이 흠뻑 느껴졌다. 가을. 가을은 직장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화려해 보이는 임원 인사가 끝나면,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떠나거나 움직여야 하는 시기, 그 시기가 가을이다. 특히 임금피크제라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직장인들에게 가을은 여느 해보다 각별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아직 회사에 몸담고는 있지만, 곧 마주할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 속내가 복잡해지는 것 같다. 언젠가 임금피크제와 퇴직을 모두 경험한 또 다른 선배가 각각의 심정이 매한가지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을 들으며 임금피크제의 고뇌가 퇴직의 번민에 견줄 만큼 힘겹다고 생각했었다.

임금피크제라는 말이 부담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회사와의 이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평생 직장인으로 살아온 이들에게 회사는 삶의 전부였다. 그 안에 지난날 내 청춘의 땀과 희망이 녹아 있고, 장년 시절의 포부와 열정이 담겨 있다. 그런 회사와 헤어진다는 사실은 분명 서글플 수밖에 없다. 수십 년을 함께했던 내 인생의 동반자, 게다가 그를 떠난 삶이 미처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임금피크제가 주는 이점은 있다. 직장인의 고용 보장을 조건으로 임금을 조정한다는 제도의 취지처럼, 연장된 기간을 활용하여 재충전의 기회로 삼거나 미래를 준비한다면 보다 긴 호흡으로 내 삶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임금피크제 기간에 개인의 취미를 살려 작은 공방을 오픈하거나 자격증을 딴 후 주말을 활용해 필요한 경력을 쌓는 경우를 보았다. 더러는 회사와 협의하여 도움이 될 만한 직무를 미리 경험해 보거나 온라인 스토어를 운영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들은 임금피크제가 아니었으면 새로운 시도는 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라 말했다. 퇴직자가 회사를 나와 실패하는 주원인이 조급함이라고 가정했을 때, 임금피크제는 이를 보완하는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임금 피크’라는 말이 ‘내 인생의 피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직장인으로서의 시간은 내 삶의 일부분이기에, 혹여 단어가 주는 편견이 있다면 이를 벗어 던지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직장인으로서 사는 동안 발견할 수 없었던 내 안의 진가를 찾아내어 다듬고 꽃피워야 한다.

돌이켜 보면 신입사원이었던 첫 번째 인생의 출발점에서도 우리의 모습은 투박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도 부딪히고 견디는 동안 만들어지고 자라왔다. 부디 선배를 포함하여 모두 임금피크제를 다음 여정을 위한 중간 기착지로 잘 활용하셨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두 번째 항로에서 더 멋지게 비행하는 인생의 진짜 피크를 맞으셨으면 좋겠다.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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