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로 순찰’ 인생 2막 연 퇴직 경찰
일주일에 5일 관악산 주변 살펴
“2개월 만에 이 일대 전문가 돼
위급 땐 지구대와 실시간 공유”
주민도 “경찰 출신이라 더 든든”
4개월 전 경찰에서 정년퇴직한 이동규씨(60)는 오늘도 순찰을 한다. 경찰 인생 31년간 경찰차를 타고 동네 곳곳을 누빈 그는 이제 ‘숲길 안전지킴이’로 서울 관악구 국사봉 일대 3.5㎞ 산자락을 두 발로 걸으며 살핀다.
지난 8월 서울 관악구의 한 생태공원 등산로에서 발생한 성폭행 살인사건으로 20대 여성이 숨졌다. 일상의 등산로에서 벌어진 흉악범죄에 시민들은 불안을 호소했다. 사건 직후 등산로 곳곳에 내걸린 ‘안전을 위하여 2인 이상 동반 산행 바랍니다’라는 현수막은 여전히 남아 있다.
등산로의 일상을 되찾기 위해 서울 관악경찰서는 경찰 인력을 차출해 지난 8월부터 한 달여간 산악순찰대를 시범 운영했다. 지난 9월부터는 관악구청이 그 순찰 업무를 넘겨받았다. 구청은 현직 경찰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씨와 같은 ‘퇴직 경찰’ 45명을 채용했다.
‘숲길 안전지킴이’라 쓰인 형광조끼를 입은 이들은 일주일에 5일(오전 9시~오후 6시), 2인 1조로 관악산·국사봉·장군봉의 시설공원 및 숲길을 순찰한다. 경향신문이 지난 1일 오전 국사봉 숲길에서 만난 이씨는 짝꿍인 윤인식씨와 함께 등산 겸 순찰을 시작했다. 이들의 순찰 코스는 산길이 험하지 않고 운동기구도 많아 주민들이 자주 찾는 동네 뒷산이다.
형광조끼 차림의 이씨가 “안녕하세요” 말을 걸 때마다 주민들은 익숙한 듯 “늘 수고가 많다” “고맙다”며 화답했다. 그는 “만나면 든든하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들도 많다”면서 “오후에 나오시는 할머니들 중엔 은행 10알이나 뻥튀기를 건네기도 한다”고 했다. 분실물 접수나 등산로 정리와 같은 생활밀착형 민원을 처리하는 일도 종종 있다고 했다. 이씨는 “순찰은 보면서 걷는 것이라 천천히 걸어야 한다”고 했다. 일대를 꼼꼼히 살피던 그는 “왔다갔다하는 등 불안을 보이는 거동수상자가 없는지 주시한다”고 했다.
주민들은 이씨에게 외진 곳을 알려주며 순찰을 부탁하기도 한다. 이씨와 윤씨는 샛길의 운동시설, 산 정상의 공사터, 고등학교 뒤편 등 인적이 드문 길도 빼놓지 않고 둘러봤다. 서울 강서구와 종로구에서 근무했던 이씨는 관악구에 연고가 없지만 “순찰 덕에 2개월 만에 국사봉 일대의 전문가가 되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성폭행 살인사건이 발생한 지 3개월. 주민들은 “아무래도 순찰을 하면 안심이 된다”고 했다. 이날 등산로에서 만난 관악구 주민 김원국씨(76)는 “안전지킴이를 보면 보호받는 느낌”이라며 “전직 경찰들은 운동도 더 잘할 것이고 책임감도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옆에 있던 김영선씨(76)도 “경찰이었으면 확실히 다르지”라며 공감했다. 주민들의 긍정적인 반응에 관악구청은 당초 올해 11월까지 예정한 사업을 내년에도 이어갈 방침이다.
이들이 순찰을 시작한 지 2개월째. 한 코스에서는 거동수상자를 112에 신고해 지구대에 인계하기도 했다.
이씨는 “위험 상황이 발생하면 관할 지구대, 파출소에 연결된 카카오톡방이 있어 바로 상황 공유가 가능하다”고 했다. 이어 “다행히 아직 저희 코스에선 그럴 일이 없었다”며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했다.
아무리 순찰을 해도 사각지대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30년 넘게 순찰을 해본 이씨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도 이씨는 형광조끼와 붉은 경광봉을 들고 순찰하는 것 자체가 범죄 예방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순찰을 계속하면 누군가 나쁜 생각을 하다가도 멈칫할 것”이라는 이씨의 발걸음은 지칠 줄을 몰랐다.
박채연·전지현 기자 applau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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