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대의 글로벌한 귀환 [만물상]
가난이 지긋지긋해 19세 때 가출한 현대 창업자 고(故) 정주영 회장은 인천 부두 막노동판에서 일했다. 노동자 합숙소에 묵던 그는 밤마다 빈대들이 달려들어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다. 빈대들이 나무 침상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것을 보고 침상 네 다리에 세숫대야를 받치고 물을 부었다. 며칠 잠잠하던 빈대가 다시 들끓었다. 빈대들이 세숫대야를 피해 벽을 타고 천장까지 올라가 밑으로 수직 낙하하는 것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정 회장은 머리를 쓰지 않는 아랫사람을 야단칠 때 ‘빈대만도 못한 X’라고 했다.
▶'사막의 여우’로 불린 독일 로멜 장군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나의 가장 큰 적은 빈대였다”고 했다. 부하들이 침구를 햇볕에 말리고, 옷을 끓이고, 살충제를 사용했으나 쉽사리 잡히지 않자, 마지막엔 침대를 불 질렀다. 로멜은 자기 침대가 불타는 것을 보면서도 빈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했다고 한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 삼간 태운다’는 말처럼 실제로 빈대로 인한 화재 사고가 적지 않았다. 조선일보 기사(1937년 8월 18일 자)엔 부산의 한 가정집에서 빈대를 잡으려 방 안에 휘발유를 뿌리고, 문밖에 모깃불을 피웠다가 불이 옮겨 붙어 가옥 20여 채가 불 타고, 15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사건이 기록됐다. 1950~1960년대에는 빈대약을 메고 다니면서 뿌려주는 행상인도 등장했다.
▶서민의 음식 빈대떡은 이름 때문에 달갑지 않은 오해를 받는다. 가난한 사람들이 먹었다고 ‘빈자(貧者)떡’이라는 설이 있고, 손님을 대접한다는 의미로 ‘빈대(賓對)떡’이라는 얘기도 있다. 가장 유력한 것은 중국 전병을 빙자(餠飣)라고 불렀는데 세월이 흘러 빈대떡으로 바뀌었다는 주장이다. 납작한 빈대의 모양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빈대의 길이는 6~9㎜ 정도인데 자기 몸 부피의 2.5~6배까지 흡혈할 수 있다. 모기보다 7~10배 많은 피를 빨지만, 지능이 떨어져 피가 잘 나오는 곳을 찾을 때까지 이동하면서 한 번에 수십 방씩 물어뜯곤 한다. 빈대는 1970년대 새마을 운동과 맹독성DDT 살충제 도입 등으로 사라졌다가 해외 교류가 늘면서 10여 년 전부터 다시 등장했다.
▶전근대적 비위생의 상징이던 빈대가 전 세계 곳곳에서 출몰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요즘 기승을 부리는 빈대는 화학적 공격에 대한 저항력까지 길러 일부 살충제에 대해선 거의 무적이 됐다고 한다. 코로나 봉쇄가 풀리면서 파리·런던·뉴욕은 물론 서울에도 빈대 신고가 늘고 있다. 결코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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