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한다
지난달 28일 서울에 기반을 둔 종합일간지들은 오랜만에 ‘대동단결’했다. 종이신문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1면에 같은 주제로 기사를 썼는데, 비판하는 대목까지 똑같았다. 바로 전날인 10월27일 정부가 발표한 ‘국민연금 개혁안’이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신문사들까지 한목소리를 내도록 만들었다.
1면 기사의 제목만 봐도 신문들이 의도와 상관없이 ‘의기투합’했음을 알 수 있다. 경향신문은 “‘숫자’ 빼고 방향만 제시/국민연금 ‘맹탕 개혁안’”으로 제목을 뽑았다. 동아일보는 “‘내는 돈-받는 돈’ 숫자 다 빠져/정부, 국민연금 개혁안 ‘맹탕’”, 세계일보는 “내는 돈·받는 돈 수치 다 빠진 ‘맹탕 개혁안’”, 중앙일보는 “총선 의식 몸 사리나/국민연금 개혁 ‘맹탕’”, 한국일보는 “국민연금 개혁 ‘빈 답안지’ 제출한 정부”라고 제목을 달았다. 토요일 자에 표지 기사가 따로 있는 한겨레는 5면 머리기사로 “숫자는 모두 빈칸 … 정부 국민연금 개혁 ‘책임 회피’”라고 비판했다.
이번 정부에 상당히 우호적이란 평가를 받는 조선일보는 1면 기사에는 “은퇴 후 일해도 국민연금 다 지급”이라는 매우 건조한 제목을 달아놓고 사설로 “숫자 뺀 맹탕 국민연금 개혁안, 이러고 문 정부 비판할 수 있나”라고 훈계했다. 국민일보도 1면 제목은 “‘더 내는’ 국민연금 개혁/젊을수록 천천히 인상”이라는 제목을 내세운 뒤 사설 제목은 “정부 국민연금 개혁안, 알맹이가 빠졌다”라고 달았다.
조그마한 사안 하나에도 각양각색으로 의견을 내놓기 좋아하는 신문들이 특정 정책을 한목소리로 비판하는 일은 드물다. 그만큼 많은 언론이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안을 기다렸고, 크게 실망했다고 볼 수 있다.
나부터 그랬다. 올해에만 경향신문 지면에 국민연금 개혁을 촉구하는 칼럼을 두 차례 썼다. 지난 2월에는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고 했고, 지난 9월에는 ‘늦었다고 생각하면 더 부지런히 움직여라’라고 정부를 다그쳤다. 연초부터 마음이 급했고, 여름이 지나서는 더 급해졌다. 지금은 말할 필요도 없다.
현 정부가 출범한 지 1년 반 정도 지났을 뿐이지만 나를 비롯한 기자들이 안달복달하는 것은 지난 경험 때문이다. 꼭 5년 전에도 국민연금 개혁은 초안까지 만들어졌다가 좌초했다. 2018년 11월7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국민연금 개혁안을 보고받은 뒤 “국민이 생각하는 눈높이와 맞지 않는다”며 이를 반려했다. 당시 복지부는 공청회에서 개혁안을 공개하고 이를 국회에 제출하는 일정까지 짜놓았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전면 재검토’를 지시하면서 모든 계획이 출발선으로 돌아갔다. 이때 하지 못한 국민연금 개혁은 문재인 정부 내내 다시 사회적 의제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정권이 교체되고, 해가 바뀐 지난 1월27일, 국민연금 재정추계전문위원회 전병목 위원장은 제5차 국민연금 재정추계 시산 결과를 발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기금 소진 시점의 차이는 5년 전에 개혁을 연기한 비용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주는 지표다.”
물론 국민연금 개혁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세대별, 소득구간별, 성별 등으로 이해관계가 달라지니 사회 전체가 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기자들은 책임질 일이 없으니 그리 쉽게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관료도 있을 것이다. 1988년 국민연금이 출범한 이후 35년간 제도 개혁이 딱 두 차례만 이뤄진 이유다.
그래도 정부가 할 일은 해야 한다. 실제로 욕먹을 것을 각오하고 개혁을 한 사례가 있지 않은가. 김대중 정부는 1998년 소득대체율을 70%에서 60%로 낮추고, 수급 개시 연령을 60세에서 5년마다 한 살씩 2033년에 65세까지 늦추는 1차 제도 개혁을 시행했다. 노무현 정부는 보험료율은 건드리지 못했지만 소득대체율만이라도 2028년까지 40%로 인하하는 결정을 내렸다.
국민연금 개혁 필요성은 지금이 그때보다 훨씬 더 크다. 출생률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졌고 고령화는 훨씬 더 진행됐다. 윤석열 대통령도 이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국무회의에서 “정치적 유불리를 계산하지 않고 연금개혁의 국민적 합의 도출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정부가 할 일을 다음 정부로 넘기지 않겠다’는 다짐이라 믿고 싶다. 부디, 4년 뒤엔 2023년 10월28일자 신문들이 보여준 ‘대동단결’이 대통령 의지를 섣부르게 판단한 호들갑으로 회자되기를 바란다.
홍진수 정책사회부장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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