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우리에겐 '준비된 지도자'가 있는가
숱한 난관에도 포기 않고
최선 다하는 순신 리더십에
조선 수군 사기 충만해져
부산포 총공격해 승전보
이순신은 4차 출전을 앞두고 74척의 판옥선을 확보했다. 이전 출전 때보다 전선의 수를 두배가량 늘렸다. 하지만 원균은 3차 출전 때와 똑같은 7척의 판옥선만 갖고 있었다. 준비된 지도자와 준비되지 않은 지도자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민생경제가 말이 아닌 지금, 우리에겐 이순신 같은 '준비된 지도자'가 있을까.
임진년 7월 13일. 3차 출전을 마치고 여수의 전라좌수영으로 돌아온 이순신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재출전 준비에 들어갔다. 아울러 육지의 전투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왜적의 정세를 끊임없이 탐문했다. 9차례의 승리를 통해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지만 순신에겐 깊은 고민이 있었다.
왜적이 조선의 최고 곡창지대이자 순신의 배후인 전라도를 그냥 둘 리 없었다. 전라도 지역에서 과연 아군이 적을 견뎌내고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적이 아군 육군을 격파하고 전라좌수영의 배후에서 계속 밀고 내려온다면 수군 병력만으로 진지를 지켜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전라좌수영에서 수군 병력을 차출하고 군량을 수급하는 일이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나마 순신 휘하의 5관 중에 순천과 흥양은 비옥한 평야지대였기 때문에 사전에 비축해 둔 군량이 있었다.
순신은 비축해둔 군량을 방답진ㆍ여도ㆍ사도ㆍ발포ㆍ녹도 등의 기지에 잘 배분해 전투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조처하고 이를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보고했다. 순신의 입장에서 안타까운 일은 육지에 장수다운 장수가 없어 수륙으로 합공 전략을 펼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런 사정도 함께 전달했으나 이광은 용인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적을 두려워하고 있던 터라 출정은 엄두도 못 냈다. 이런 평판 때문에 그를 따를 만한 군사가 있을 턱이 없었다. 순신의 고심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었다.
이때쯤 전주를 공격해 오던 왜군을 웅치와 이치에서 기적적으로 막아냈다는 전갈이 왔다. 김제 군수 정담이 지키던 웅치고개가 비록 뚫렸지만, 왜적 또한 이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이었다.
게다가 웅치를 넘어 전주로 향하던 왜군은 동복 현감 황진에게 큰 타격을 입었다. 황진은 전주의 길목인 안덕원에서 야영 중이던 적의 부대를 급습했다. 이로 인해 적은 전주를 뚫지 못했다.
적은 전주 공략에 앞서 금산에서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과 7000명의 의병을 전멸시켰다. 이같은 기세로 청주성을 지키던 조헌의 700명의 의병은 물론 승병장인 영규 대사가 이끌던 800명의 승병마저도 전멸시켰다.
더욱 무서운 기세로 진주를 향해 진격하던 왜적을 황진은 흙성조차 없는 산등성이와 고개에서 물리친 것이다. 전라도와 인접한 경상우도에서도 김면과 곽재우가 큰 활약을 펼친 데 힘입어 왜적 육군은 경상도를 거처 전라도로 진출하는 길이 막혀버렸다.
순신은 전라우수영에서 판옥선과 각종 무기, 그리고 병력을 증강하는 데 전력을 다할 수 있었다. 많은 난관에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그의 리더십에 힘입어 조선 수군의 사기는 충만했다.
이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은 제4차 출전을 앞두고 74척의 판옥선을 확보했다. 이는 예전보다 2배가량 늘어난 규모다. 제3차 출전 때 7척을 이끌고 참전했던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안타깝게도 여전히 7척에 머물렀다. 어찌 됐든 조선 수군은 80여척의 전투선을 운영할 수 있게 됐다.
이런 가운데 전라좌수영 함대와 전라우수영 함대는 여수에서 8월 1일부터 줄곧 실전을 방불케 하는 합동 훈련에 돌입했다. 그러던 중 경상우도 감찰사 김수가 보내온 공문이 도착했다. 육상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이 약탈한 물건들을 바다 건너 본국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양산과 김해강 등으로 모여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강력한 조선 수군으로 나라를 수호하겠다는 순신의 확고한 목표 아래 최강의 수군으로 거듭 태어난 전라도 연합함대는 마침내 8월 24일 제4차 출전에 나섰다. 이날 순신은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오후 4시쯤에 배를 출항, 노질을 재촉해 노량 뒷바다에 이르러 정박했다. 자정에 다시 달빛을 타고 배를 띄워 사천 땅 모사랑포에 이르렀다. 날은 벌써 밝았지만 새벽 안개가 사방에 자욱해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25일 아침 안개가 걷히자 순신은 함대를 다시 몰아 당포 바다 위에서 원균의 경상우수영 함대와 조우, 오후 4시쯤 당포에 도착해 하루를 묵고 다시 항해를 이어갔다. 26일 거제 앞바다를 거쳐 27일엔 칠전도에 도착, 웅천 현감 이종인과 만나 적의 동향을 파악한 후 진해 앞바다를 건너 저녁 10시쯤 잠을 청했다. 순신은 이날 일기에 "나그네의 마음은 편안하지가 않고 꿈자리도 몹시 어지러웠다"며 고독한 리더의 심정을 기록했다.
8월 28일 새벽, 순신은 "어지러웠던 꿈이 오히려 좋은 꿈인 것 같다"며 어려움을 극복하고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굳게 다졌다. 조선 연합함대는 출전한 지 벌써 5일째가 됐지만 왜적의 함선을 발견할 수 없었다. 29일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적의 함선을 발견했다. 이날 아침 동래 땅 장림포로 이동하던 아군은 적의 대선 4척과 소선 2척을 발견했다.
그런데 조선 수군을 알아챈 적들의 대부분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주해 버렸다. 적의 수장 풍신수길이 내린 '해전금지령'의 영향이 컸다. 적의 함선들은 아군의 불세례를 받고 모두 수장됐고 이때 480여명의 왜군이 제거됐다.
이날 밤 순신은 이억기, 원균과 함께 회의을 열고 두 가지 문제를 놓고 논의했다. 수색과 격파 작전으로 김해, 양산 두곳의 강을 먼저 치느냐, 아니면 전자를 포기하고 부산포를 공격할 것인가. 원균은 강을 먼저 치자고 주장했다. 이억기는 "우리는 군의 지휘권을 좌수사 영감에게 양도했기 때문에 그 명령을 따르겠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원균은 마음을 돌려 이억기의 주장을 따르겠다고 했다.
그렇게 밤이 깊도록 토의한 결과 당초 순신의 의견대로 부산포를 총공격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이는 평양에서 의주로 피난처를 옮긴 임금 선조의 희망사항이기도 했다. 선조는 순신의 연이은 승전 소식에 들떠 부산포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바 있다. 물론 아무런 응원과 지원도 없었지만….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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