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의 지음(知音), 사진작가 [조진만의 건축탐험]
편집자주
일상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공간들과 건축물의 소개와 그 이면에 담긴 의미를 필자의 시선에 담아 소개한다. 건축과 도시 공간에서 유발되는 주요 이슈들과 사회문화적 의미를 통해 우리 삶과 시대의 의미도 함께 되새겨 본다.
건축가는 건물이 완성되기 전에는 도면, 투시도와 같은 형식을 통해 생각을 전달한다. 하지만 건물이 완성된 후에는 사진을 통해 그것을 전달하고 또 기록화한다. 전자는 건축가 스스로 만들지만, 후자는 사진작가라는 타자의 감성과 재능에 의해 건축가의 사고가 재창조된다. 그래서 건축가들은 지음(知音)과 같이 자신의 의도를 잘 이해해 주는 사진작가를 갈구한다.
현대 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에게 이런 존재는 헝가리 출신 사진작가 루시앙 에르베(Lucien Hervé)였다. “당신은 건축가의 영혼을 가졌소.” 르 코르뷔지에가 루시앙을 처음 만난 날 그의 사진들을 보고 건넨 말이다. 루시앙은 코르뷔지에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전속 사진가로 늘 함께 작업했다. 어떻게 그런 사진을 만드느냐는 질문에, '나는 가위로 사진작가가 되었다'는 루시앙의 대답은 흥미롭다. 그는 불필요한 부분을 가위로 없애고 공간의 진수를 담는 부분의 사진들을 통해 오히려 형태보다 질감이나 건물의 특징에 주목했다. 그래서 일견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전체 모습을 담는 사진에서 놓칠 수 있는 건축의 풍부한 총체적 경험을 전달한다.
한국의 대표건축가로 불리는 고 김수근 선생의 지음은 일본인 사진가 무라이 오사무(村井 修)였다. 당시 국내에는 건축 전문 사진가는 없다시피 했고, 일본 유학파였던 김 선생은 자연스레 당대 최고 일본 사진가를 찾게 되었다. 둘은 단번에 서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김수근 선생이 55세로 이른 생을 마감하기 전 작품까지 함께했다. 김수근 건축은 그의 사진에 의해 세계에 소개됐으며 또 영구적으로 기록됨으로써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그는 국내 구석구석을 돌며 ‘이조의 건축’이란 한국의 전통 건축을 소개하는 사진집을 펴냈을 정도로 한국에 관심과 애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대학 졸업 후 처음 입사한 설계사무소 막내일 때, 운 좋게도 나는 노작가 무라이 오사무 선생의 조수 역할을 두 차례 한 적이 있다. 이때 가장 난감했던 기억이 10층 건물 대학교 교실의 전등이 촬영에 방해가 되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모든 방의 불을 껐다 다시 점등하는 것이었다. 당시 75세의 작고 야윈 몸으로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종일 촬영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나의 첫인상이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무라이 선생은 내게 간단히 건물에 대해 몇 마디를 묻고는 건물의 내외부를 종횡무진 살피며 다녔다. 피사체를 자신의 몸으로 파악하고 마음으로 읽어내는 중이었다. 그리곤, 불현듯 멈추어 삼각대를 설치하고 내게 뷰파인더 속을 보라고 했다. 그 안에는 이전까지 내가 보았던 그 건축물과는 다른 처음 보는 새로운 풍경이 있었다. 한 장의 사진에 이렇게 압축된 건물의 정수가, 순간의 아름다움이 응축된 세계가 있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어느새 나는 그의 촬영 동선을 따르며 건축을 배우고 있었다.
오래전 아르코미술관에서 진행된 김수근 타계 20주년 추모전시회는 오롯이 무라이 선생의 사진으로만 채워졌다. 팔순을 눈앞에 둔 노작가는 '언제 다시 한국에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마지막으로 김수근 선생의 묘를 조문하게 운전을 부탁했다. 그의 20년 된 희미한 기억에 의지해 무척 더운 여름 산을 한참 오르다 지쳐 길을 잘못 들었나 하던 차에 묘지가 나타나 합장을 올리려는 때였다. 선생이 헌화할 꽃을 차 안에 두고 온 것이었다. 나는 부리나케 산에서 내려와 꽃을 가지고 올라간 뒤 무사히 예를 표할 수 있었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하산해 주차한 곳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길 한구석의 나뭇가지가 걷히면서 또 하나의 무덤이 살며시 드러났고, 묘비에는 김수근 선생의 이름이 선명히 적혀 있었다. 이미 두 번의 등정으로 지친 다리를 힘들게 이끌고 잘못 헌화했던 꽃을 다시 가져와야 했던 선생과의 마지막 추억이 불현듯 오늘 아침 뇌리를 스친다.
조진만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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