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차’가 뭐가 어때서
[한겨레 프리즘]
[젠더 프리즘] 장수경 | 젠더팀장
얼마 전 5살짜리 자녀를 둔 고등학교 친구를 만나 들은 이야기다. 친구는 자녀가 바닥에 앉을 때 한쪽 다리를 오그리고 다른 쪽 다리를 그 위에 포개 올려놓는 ‘나비다리’를 하지 않도록 하라는 의사의 권고를 들었다고 했다. 단어가 낯설어 뜻을 찾아본 친구는 ‘아빠다리’보다 성평등한 단어라는 생각이 들어, 남편에게도 아이에게 나비다리란 말을 쓰라고 권했단다.
친구 남편의 반응은 어땠을까. “너 페미냐?”였다. 친구가 사회적 의미와 효과 등을 설명했지만 소용없었다. “유난이다” “예전부터 잘 쓰던 단어를 왜 바꾸라고 하느냐”는 말만 돌아왔단다.
지난 주말,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때아닌 ‘유아차’, ‘유모차’ 논쟁이었다. 한 유튜브 예능프로그램에서 출연진이 ‘유모차’라고 말했는데 제작진이 ‘유아차’라고 자막에 표기한 것을 두고, 일부 남초 커뮤니티 회원들이 ‘제작진 중에 페미니스트가 있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동안 방송 제작진은 출연진이 말한 비표준어나 외래어 등을 자막에서 고쳐서 표기해왔는데 이를 트집 잡았다. 지난 7월 여성 게임 원화가의 과거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발언을 털어 일자리에서 끊어낸 것처럼, ‘페미 검증’ 영역 확장에 나선 것처럼 보였다. 불똥은 ‘유모차’ ‘유아차’ 모두 표준어로 인정하면서도 성평등 단어인 ‘유아차’ 사용을 권한 국립국어원으로도 튀었다.
2018년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유모차’ 대신 사용을 권장한 ‘유아차’는 몇년 전부터 지하철역, 광고, 도서 등 일상 곳곳에서 잘 쓰이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단어 전쟁’이 일어난 셈이다. 언론은 “논란” “시끌” “갑론을박”이라는 단어로 ‘중립’을 가장한 채 ‘논란 저널리즘’을 중계했다.
여성혐오와 페미니즘 백래시가 이렇게 심각한데도, 성평등·성폭력 정책의 힘을 빼려는 윤석열 정부는 절망스럽다. 성차별·성폭력에 맞서 정책을 설계하고 시행하도록 하는 여성가족부는 2024년 예산안에서 양성평등 문화 확산 예산을 56.1%, 여성 인재 양성 및 사회참여 확대 예산은 43.7%나 줄였다. 가정폭력상담소 운영 예산은 27.5%, 성폭력 피해자 의료비 지원 예산도 18% 축소했다. 성매매 피해자 구조 지원은 반토막 났고, 초중고교생 성·인권 교육 사업 예산과 디지털 성범죄 예방교육 콘텐츠 제작, 이주여성 인식 개선과 폭력피해 예방 홍보 사업 예산은 전액 삭감됐다. 김현숙 여가부 장관은 지난 2일 여가부 국정감사에서 예산 삭감 이유와 관련해 “효율화” “재구조화”를 언급했다.
성차별·성폭력 정책 주무부처가 이럴진대, 다른 부처는 오죽할까. 정부부처 양성평등 예산은 줄줄이 삭감됐다. 고용노동부는 ‘고용평등 상담 지원’ 내년 예산을 54.7% 삭감하고, 일자리에서 겪는 성차별과 성폭력을 겪은 여성노동자를 20여년 동안 지원해온 민간 고용평등상담실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교육부는 대학 내 성범죄 근절 및 안전환경 조성에 쓰이는 내년 예산을 절반으로 줄였다.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고 원인을 잘못 짚으니 해결책도 엉망이다. 보건복지부는 출산율을 높이겠다며 지난 3일 7대 종교단체와 종교계 협의체 회의를 열었다. 이기일 복지부 제1차관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출산율이 높은 것에 대해 희망적으로 생각한다”며 종교계와 협력 이유를 밝혔다. 이 정부는 종교 지도자들이 자녀를 낳으라고 하면 출산율이 오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유아차-유모차 논쟁이나 벌이는 나라에서 출산율을 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적는다. 일하는 여성의 환경을 평가하는 ‘유리천장 지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11년째 꼴찌인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명(2023년 2분기 기준)이다. 유리천장 지수 1위인 아이슬란드는 1.82명(2021년 기준), 2위인 스웨덴은 1.67명이다. 3위도 궁금하다고? 노르웨이는 1.55명이다.
flying710@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공매도 봉쇄로 ‘개미 표심 잡기’…외국인 이탈 등 후폭풍 우려
-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한달…가자에서만 9400명 숨졌다
- ‘빵 사무관’에 ‘스벅 찾는 국장’…MB식 통제로 물가 잡는다?
- 김포 편입 서울은 ‘접경 도시’…수도 사수 작전계획 혼선 불가피
- 경찰이 엄마 대신 모유 수유…이틀 굶은 4개월 아기 울음 그쳐
- 200살 나무에 ‘잣 모양’ 밤이 주렁…땔감 될 뻔했지만
- ‘김포 서울 편입’ 여당서 첫 반대…서병수 “경쟁력 갉아먹어”
- 정부·여당, 은행 ‘횡재세’ 공세…“금융리스크 우려” 반론도 거세
- 병원 직원옷 입고 도주한 특수강도…안양→의정부→양주→?
- 정의당 ‘선거연합정당 추진’ 가결…이정미 사퇴, 비대위 체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