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한의 토포필리아] 공원, 도시의 공간적 영양제

한겨레 2023. 11. 5.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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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한의 토포필리아]

서서울호수공원은 서울 서남부권의 공간적 영양제다. 사진 배정한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공원 답사는 언제나 즐겁다. 그 즐거움을 두배로 만드는 건 뒤풀이. 십여년 전 가을 오후, 대학원생들과 함께 새로 개장한 공원을 마음껏 걸었다. 미국조경가협회(ASLA) 작품상까지 받은 공원 디자인은 더없이 세련되고 감각적이었지만, 주변 동네를 아무리 둘러봐도 우리의 지친 발걸음을 위로해줄 곳이 없었다. ‘응답하라 1988’에 나올 법한 호프집을 겨우 찾아냈다. 문제는 2차였다. 우리는 사장님의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그 집에 다시 들어가고야 말았다. 3차는 같은 가게 안에서 옆 테이블로 옮겨 후한 서비스 안주의 세례를 받으며 해결했다. 서서울호수공원의 추억.

낡은 주택가의 맥 없는 풍경, 살벌한 도로 경관, 심각한 비행기 소음. 서서울호수공원이 입지한 서울 양천구 신월동은 낙후 이미지가 강한 동네다. 제어할 수 없는 부동산 폭등의 광기마저도 늘 비껴갔다. 공원 인프라가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공원이 들어선 자리에는 오랫동안 정수장이 있었다. 1959년 김포정수장으로 시작해 1979년부터는 신월정수장이 가동됐다. 강서 지역에 하루 12만톤의 수돗물을 공급하던 정수장은 2003년 수명을 다하고 폐기됐다. 여러 개발계획이 검토된 끝에 지역간 공원‧녹지 불균형을 해소하는 친환경 공원으로 가닥이 잡혔고, 선유도공원에서 시작한 산업시설 재활용 공원의 맥을 잇는 서서울호수공원(설계 씨토포스)이 2009년 문을 열었다.

공원에 들어서면 세월의 얼룩이 깊이 밴 짙은 갈색 시설물과 조형물들이 정수장의 기억을 환기한다. 직경 1m 수도관을 재활용한 것들이다. 옛 시간과 새 생명이 동거하는 공원 깊숙이 걸음을 옮기면 서울에서 보기 드문 인공호수가 나온다. 정수장 중앙부에 있던 호수를 그대로 살렸는데, 주변부에 심은 수생식물 덕분에 다양한 생물이 서식한다. 공원 이용자가 호수의 감상자라면, 비인간 생명체는 호수의 거주자다. 호숫가에 포개놓은 계단형 데크는 광장인 동시에 밀실이다. 누군가는 모이고 또 누군가는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 숨는다. 고즈넉한 호수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볼 수 있는 넓은 의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정수장 침전조 구조물을 허물지 않고 살려 정원 공간을 만들었다. 사진 배정한

서서울호수공원의 또 다른 주연은 정수장의 침전조 구조물을 재활용한 정원형 공간이다. 콘크리트 벽과 기둥의 울퉁불퉁한 생살이 공간을 기하학적으로 구획하며 정원 상부 산책로를 지탱한다. 산책로에서는 하부의 정원과 수생식물원, 생태수로뿐 아니라 멀리 떨어진 호수를 조감할 수 있다. 공중 산책로 덕분에 공간이 두배로 두꺼워진다. 구조물 밑에는 공원 단골 이용자만 알 수 있는 비밀 아지트가 곳곳에 숨어 있다.

그때 그 호프집의 추억을 떠올리며 서서울호수공원을 다시 찾았다. 평일 오후인데도 앉을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공원의 여러 갈래 길이 건강한 산책자들로 가득했다. 그들의 표정에서 좋은 공원 있는 동네에 산다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호숫가에선 가족과 연인의 대화가, 침전조 공중 길에선 평온한 유모차 산책이, 침전조 정원 공간 곳곳에선 나른한 휴식과 독서가 공원의 오후를 초대하고 있었다.

정수장 출신 산업시설 재활용 공원이라는 점은 마찬가지지만, 서서울호수공원과 선유도공원의 장소성은 다르다. 선유도공원은 비일상의 미감을 초청하고, 서서울호수공원은 일상의 경험을 담아낸다. 선유도공원에 미학을 대입한다면, 서서울호수공원엔 사회학이 제격이다. 구경꾼의 시선으로 잠시 보더라도 서서울호수공원은 지역사회의 공간적 영양제라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공원 주변도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다. 이제 2차, 3차 걱정할 필요가 없다. ‘스세권’ 카페까지 들어선 걸 보면 이 공원이 주변 동네에 미친 영향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비행기가 지나가면 41개 분수가 물줄기를 뿜으며 소음 스트레스를 날려버린다. 사진 배정한

참,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 이 공원 최고의 매력은 비행기의 ‘배’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공원 호수 위 하늘을 가르며 김포공항을 향해 내려가는 비행기의 굉음이 어마어마하지만, 계속 하늘을 쳐다보며 비행기를 기다리게 된다. 비행기가 지나가는 경로를 따라 직선으로 배치한 41개 분수가 물줄기를 뿜으며 소음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 때문. “오히려 소음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는 조경가 최신현(씨토포스)의 말처럼, 최악의 환경 조건을 재치 있게 극복한 설계다. 비행기가 지나갈 때마다 공익근무요원이 버튼을 누른다는 우스개도 있지만, 실은 81db 넘는 소음을 센서가 감지해 분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평생 소음에 시달리던 신월동 주민들도 이제 공원 안에선 비행기 소리와 분수 쇼를 기대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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