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만 먹고 버틴다”… 하위 20% 가계 월 35만원 적자 허덕 [생계위기 내몰린 저소득층]

이희경 2023. 11. 5.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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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비 등 물가 고공행진에 직격탄
필수 생계비 月 3만9000원 늘 때
가처분소득 1만8000원 증가 그쳐
가계 적자규모 1년 새 6만원 늘어나
지난 10월 물가상승률 3.8% 우유값 폭등
일용직근로자 취업 6개월 연속 감소
정부 “라면 등 7개 품목 물가 전담 관리”
2024년 생계급여 인상·지원 강화 방침에도
“복지 사각 많아 생계난 가중 우려” 지적
# 내년 3월까지 육아휴직을 할 생각이었던 최모(31)씨는 다음 달 회사에 복귀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최근 몇 달 새 다락같이 오른 물가에 남편의 월급과 육아휴직 수당만으로는 육아비용을 포함한 생활비를 감당하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최씨는 “분유·이유식 가격이 많이 올라서 한 달에 60만원 정도 들고, 어린이집 비용 50만원까지 벌써 100만원이 훌쩍 넘는다”며 “정부에서 영아급여, 출산축하금 등 지원금을 받아봐야 마이너스다”라고 말했다. 그는 “전세대출 이자에 임대료에 최근에는 식재료비도 너무 올라 결국 부부가 매달 100만원씩 넣던 ‘청년내일저축계좌’도 올해 초에 중단했다”며 “요새 들어 왜 사람들이 결혼을 안 하고 애를 안 낳는지 뼈저리게 느낀다”고 토로했다.
 
# 서울 홍대입구역 근처 점포를 돌며 6년째 박스를 주워 팔고 있는 50대 A씨는 최근 제대로 된 식사를 못했다. 1kg에 80원가량 하던 폐지 가격이 절반 이하인 30원까지 곤두박질쳐 발품을 팔아 100kg를 모아봐야 푼돈만 쥘 수 있기 때문이다. A씨는 폐지가 가득 실린 리어카를 가리키며 “이거 다 팔아봐야 3000원 나올까말까 한다”면서 “예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지만 식재료가 너무 비싸져서 요새는 매일 라면밖에 못 먹는다”고 말했다. 정부 지원 여부에 대해 묻자 A씨는 “그런 거 잘 모른다”면서 “그냥 폐지 팔아서 버는 돈으로 먹고 산다”고 말했다.
서울 서초구 서초대로 인근 고물상에서 한 할머니가 수거한 폐지를 옮기고 있다. 뉴시스
고물가와 경기 둔화 충격으로 지난 1년 저소득층의 살림이 악화된 것으로 확인됐다. 필수생계비는 늘어나는 데 소득이 받쳐주지 못하면서다. 1분위(소득 하위 20%)의 최근 1년(2022년 3분기~2023년 2분기) 월평균 필수생계비는 직전 1년(2021년 3분기~2022년 2분기)과 비교해 4만원 가까이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필수생계비는 식료품·비주류음료 등 줄이고 싶어도 쉽게 줄이기 힘든 지출을 말한다. 필수생계비가 껑충 뛴 가운데 처분가능소득은 같은 기간 월평균 1만8000원 가량 늘어나는 데 그치면서 1분위의 가계 사정은 더욱 악화됐다.

2분위(소득 하위 20~40%) 역시 올해 2분기 월평균 필수생계비가 3만5000원 가량 늘어난 가운데 처분가능소득은 약 4만원 줄어들면서 가계부의 흑자액은 6만원 넘게 줄었다. 정부는 하반기로 갈수록 경기 회복세가 강해질 것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아래층까지 온기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는 데다 물가 불확실성마저 커지고 있어 향후 저소득층의 살림살이가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필수생계비 증가에 짓눌린 저소득층

5일 통계청 가계동향조사의 ‘소득 5분위별 가구당 가계수지’(전국, 1인이상)를 세계일보가 분석한 결과, 2022년 3분기부터 올해 2분기까지 최근 1년 간 1분위의 월평균 필수생계비는 74만4271원으로 나타나 직전 1년(2021년 3분기~2022년 2분기) 평균인 70만5233원보다 3만9038원 늘었다. 필수생계비는 식료품·비주류 음료, 주거·수도·광열, 교통, 식사비 등으로 구성된다. 가계동향조사 지출 항목은 계절성이 반영되기 때문에 전년 같은 분기와 비교한다. 1분위는 전체 가구를 소득 순으로 일렬로 세웠을 때 하위 20%를 차지하는 집단으로, 조사 때마다 구성은 달라진다.
서울 시내의 한 은행 ATM에서 시민이 현금 5만원권을 세고 있다. 뉴시스
분기별로 보면 지난해 3분기 필수생계비는 70만9644원으로 2021년 3분기(69만1262원) 대비 1만8382원 늘었다. 이후 지난해 4분기 필수생계비가 78만1516원으로 집계돼 전년 동분기보다 7만500원 급증한 데 이어 올해 1분기에도 필수생계비가 77만3002원으로 6만8087원 늘었다. 올해 2분기 필수생계비가 71만2922원으로 2022년 2분기(71만3749원)와 거의 비슷했던 점을 감안하면 최근 1년 간 저소득층의 필수생계비가 고공행진했던 셈이다.

필수생계비가 증가하더라도 처분가능소득이 더 많이 늘어나면 가계 살림에는 문제가 없다. 처분가능소득이란 소득에서 세금 등 비소비지출을 제외해 실제 쓸 수 있는 돈을 말한다. 하지만 1분위의 처분가능소득은 최근 1년(2022년 3분기~올해 2분기) 월평균 91만5136원으로 2021년 3분기~2022년 2분기(89만6658원) 대비 1만8478원 증가하는 데 그쳤다. 쓸 수 있는 소득보다 어쩔 수 없이 지출해야 하는 성격의 필수생계비의 증가분이 2배 이상 컸던 셈이다.

2분위 사정도 좋지 않다. 올해 2분기 2분위의 월평균 필수생계비는 104만137원으로 전년 동분기보다 3만4868원 증가했다. 반면 처분가능소득은 같은 기간 225만922원에서 221만1359원으로 3만9563원 감소했다.

저소득층의 필수생계비가 증가한 건 물가가 높은 수준에서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1분위의 필수생계비 중 주거·수도·광열의 지출액은 지난해 3분기 19만7737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 대비 5210원 올랐고, 지난해 4분기(26만736원)와 올해 1분기(30만4709원)에도 각각 2만9155원, 4만1435원 증가했다. 올해 2분기에도 23만8957원으로 1만6000원 이상 올랐다. 식사비 역시 올해 2분기에만 전년 대비 2000원 정도 소폭 하락했을 뿐 2022년 2분기(1만8382원), 2022년 3분기(3만2141원), 2023년 1분기(3만3688원) 3분기 연속 상승세를 보였다. 2분위 역시 올해 2분기 교통비가 19만7426원으로 전년 동분기(17만2829원)보다 2만4000원 이상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적자액 늘고 있는 저소득층 가계

처분가능소득보다 필수생계비가 더 크게 증가하면서 저소득층 가계 사정도 눈에 띄게 악화하고 있다. 가계수지 추이를 보면 최근 1년(2022년 3분기~올해 2분기) 1분위의 흑자액은 월평균 -35만8847원을 기록했다. 흑자액은 처분가능소득에서 필수생계비를 포함한 각종 소비지출을 제외한 개념이다. 이는 직전 1년(2021년 3분기~2022년 2분기) 평균 흑자액인 -29만1897원보다 6만6950원 악화한 것이다.

1분위의 흑자액은 지난해 3분기 -34만3443원으로 전년 동분기 대비 7만5677원 줄었고, 지난해 4분기에는 -34만9968원으로 전년보다 4만4991원 줄었다. 그러다 올해 1분기 흑자액이 -46만652원까지 악화돼 14만7623원 급감한 뒤 올해 2분기에는 -28만1327원으로 지난해 동분기보다 489원 개선되는 데 그쳤다. 2분위 역시 올해 2분기 흑자액이 42만2257원에 그쳐 전년 동분기 대비 6만3572원 감소했다.

문제는 저소득층의 살림이 향후에도 개선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우선 물가가 좀처럼 잡히지 않으면서 장바구니 물가가 고공행진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10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8%로 7개월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지난달 우유의 물가 상승폭이 14.3%로 2009년 8월(20.8%) 이후 가장 크게 올랐고, 이달 사과 도매가격이 (후지·상품) 도매가격이 10㎏에 5만∼5만4000원으로 1년 전보다 79.9∼94.2% 올라 두 배 수준이 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정부가 태스크포스(TF)를 꾸려 라면, 빵, 과자, 커피, 아이스크림, 설탕, 우유 등 7개 품목을 전담 관리하겠다고 밝혔지만 효과는 미지수다.
5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유제품을 구매하고 있다. 소비자 물가가 3개월 연속 3~4%대로 고공행진하고 있다. 지난달 우유 물가가 14% 이상 올라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4년여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최상수 기자
배달전문 찌갯집을 운영하고 있는 변모(36)씨는 “파 10단짜리가 원래 1만9000원이었는데 최근에는 4만원대까지 치솟는 등 재료비가 뛰었고, 가스비와 전기료 등도 올라 운영비가 과거보다 많이 든다”면서 “처음에 8500원 받던 김치찌개를 어쩔 수 없이 1000원 올렸지만 재료값 오른 거 생각하면 마진은 오히려 줄었다”고 말했다.

아울러 정부가 연말로 갈수록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고 밝혔지만 온기가 저소득층까지 전달되지 않고 있는 점도 문제다. 실제 저소득층에서 비중이 높은 일용직 근로자와 임시 근로자의 취업자 수는 각각 6개월, 16개월 연속 줄고 있다.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물가가 잡힐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면서 “경기가 좋지 않은 가운데 가계의 실질소득은 늘어나지 않고 소비 여력도 없기 때문에 1, 2분위의 삶이 상당히 팍팍해질 것으로 우려된다”고 말했다. 그는 “내년 생계급여 등이 인상됐지만 (복지) 사각지대가 굉장히 많고, 그 부분과 관련된 예산이 많이 깎인 점도 문제”라고 덧붙였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필수생계비가 증가한 배경에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그간 억눌렸던 소비 심리가 분출하는 ‘펜트업’ 효과도 있었다”면서 “내년 생계급여가 13.2%로 대폭 인상되는 데다 올해 취약계층 대상 에너지 바우처 지급, 난방비 지원 등 서민 부담 경감을 위한 지원을 시행하고 있어 저소득층 생계는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이희경 기자, 채명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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