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옛 전통도 새 이야기처럼 만드는 나라"

김보라 2023. 11. 5.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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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인터뷰 - 사비네 하그 빈미술사박물관장
리움선 '버들 북 꾀꼬리' 관람
"수백년 전 그림 다시 숨쉬게 해 …
영리한 공간 활용 경이로운 수준"
중앙박물관에선 '사유의 방' 호평
"큰 방에 반가사유상 2점만 배치
여백의 미에 온몸에 전율 흘러"
지난 3일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을 찾은 사비네 하그 빈미술사박물관장이 강서경 작가의 설치작 ‘버들 북 꾀꼬리’를 살펴보고 있다. 이솔 기자


오스트리아 빈은 문화와 예술의 도시다. 뛰어난 음악회와 전시회가 1년 내내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린다. 그 중심엔 인구 200만 명의 도시 인구와 맞먹는 관람객이 매년 다녀가는 곳, 수천 점의 역사적 유물과 미술사 명작들로 가득 찬 오스트리아 최대 미술사박물관인 국립빈미술사박물관(KHM)이 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산은 물론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대가들의 그림 2200여 점이 자리 잡고 있다.

빈미술사박물관을 비롯해 인류학박물관, 황실보물박물관, 황실무기박물관, 테세우스 사원, 제국마차박물관, 암브라스성, 국립극장박물관 등 8개 박물관 연합체를 이끄는 사비네 하그 KHM 관장(61)이 지난 3일 서울을 찾았다.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 한국경제신문사와 함께 ‘합스부르크 600년-매혹의 걸작들’ 전시를 공동 기획했을 때 한국을 찾은 이후 두 번째 방한이다.

그의 이번 방한은 5개월여간 33만 명의 관람객이 찾은 ‘합스부르크’ 전시가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교류 증진에 기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뤄졌다. 하그 관장은 알렉산더 판데어벨렌 오스트리아 대통령을 대신해 윤성용 국립중앙박물관장과 김정호 한국경제신문 사장에게 ‘학술·예술 명예십자훈장’을 수여하기 위해 2박3일의 짧은 일정으로 한국을 다녀갔다. 이 기간에 그는 “한국의 매력적인 전시 기획 현장을 보고 싶다”며 리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하그 관장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강서경 작가의 ‘버들 북 꾀꼬리’ 전시였다. 매표소 앞 로비부터 관람객을 맞이하는 영상 작품과 설치 작품들을 본 그는 “한국 전시 기획자들의 창의력과 상상력, 공간을 활용하는 능력은 같은 업계에 있는 다른 나라의 큐레이터들이 보고 배울 만한 점이 많다”며 “수백 년 전 그려진 그림도 다시 살아 숨쉬게 하고, 모든 공간을 아주 영리하게 쓰는 모습이 경이로운 수준”이라고 했다.

‘버들 북 꾀꼬리’는 전통에서 찾은 개념과 미학을 현대적인 조형언어로 재해석하는 강서경 작가(46)의 역대 최대 규모 미술관 전시다. 동양화를 전공한 강 작가는 조각, 설치, 영상, 퍼포먼스 등으로 다채롭게 자신의 작품세계를 펼치며 유럽과 미국에서 더 주목받았다. 이번 전시는 투병 생활로 갑작스레 작품 활동을 중단했던 강 작가의 복귀전이기도 하다.

한국 산의 사계, 공중에 매달려 있는 귀, 떠다니는 해와 달은 물론 기억 속 할머니의 모습과 익명의 사람들까지 세련된 조형언어로 표현한 130여 점의 작품이 모였다. 곽준영 리움 전시기획실장이 세종대왕 시대의 악보인 ‘정간보’와 전통 1인무인 ‘춘앵무’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라고 설명하자, 하그 관장은 “해설을 듣기 전에도 절제되고 현대적인 아름다움에 반했는데, 이것이 전통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이라고 하니 더 놀랍다”고 했다. 춘앵무와 정간보의 원형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아본 그는 “원형도 아름답지만 현대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작품으로 재창조한 것에 크게 감동했다”고 했다.

작품 사이를 천천히 거닐던 그는 “미술관으로 오는 길에 성북동과 삼청동 일대에서 봤던 야트막하고 아름다운 산세와 울긋불긋 단풍이 든 나무의 모습들이 전시장 안에서 떠올라 마치 새와 함께 거니는 듯한 감성을 자아낸다”고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유의 방’은 하그 관장이 한국의 전시장 중 손에 꼽는 아름다운 공간이다. 미술관을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소극장 크기의 추상적인 전시 공간에 반가사유상 두 점만 놓아둔 것은 대담하고도 용기 있는 결단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여백이 많은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온몸이 에너지로 전율하고, 감정적으로 아주 깊게 동요했어요. 천년 넘은 세월을 버틴 보물이 추상적인 장소와 만났을 때 가질 수 있는 힘을 느낀 거죠. 종교와 인종, 나이와 성별을 떠나 예술이 가진 힘을 증명한 전시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2009년부터 빈미술사박물관 관장을 맡고 있는 그는 그동안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기획의 전시를 함께했지만 한국에서 불러일으킨 ‘합스부르크 열풍’이 가장 혁신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얀 브뤼헐의 꽃 정물화들을 생화가 꽂힌 화병과 함께 배치하고, 갑옷 전시 작품들을 멀티미디어 영상과 전시해 누구나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기획한 것 등을 예로 들었다. 단지 전시 기획뿐만 아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오스트리아 ‘국민 그림’ 마르가리타 공주가 서울 시내버스에 타고 다니며 시민들과 인사를 나눌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이런 파격은 오직 한국이어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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