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리·수요 부진에 전쟁까지…"꼭 필요한 설비·R&D만 투자할 것"
가장 큰 변수는 '인플레·고금리'
'지정학적 리스크' 우려도 커져
내년 실적 전망 '신중론' 우세
기업 2곳만 "설비투자 증액"
제품 수급 관련 투자는 최소화
채용 올해와 비슷한 수준 유지
“내년 매출 목표치를 올려야 하는데 경영 환경이 악화하고 있다. 진퇴양난이다.”(대기업 전자 계열사 사장)
“돈줄을 쥔 최고재무책임자(CFO)의 힘이 강해지고 있다. 불황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는 방증.”(4대 그룹 경영지원실 관계자)
국내 주요 기업들이 내년에도 비상 경영 체제를 이어간다. 기업을 압박하는 경기 둔화 등 악재가 이어지고 있고 22대 총선, 미국 대통령 선거 등 경영 불확실성을 키우는 정치 이벤트까지 대기하고 있어서다. 대다수 기업은 긴축 경영 기조를 강화하는 가운데 필수적인 연구개발(R&D) 및 시설 투자만 유지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
보수적인 실적 전망
5일 한국경제신문은 삼성, SK, 현대자동차, LG 등 10대 그룹의 기획·전략·재무 담당 임원들에게 ‘내년 경영실적 전망’에 대한 응답을 받았다. 보통 기업들은 다음 연도 실적과 관련해 희망과 기대를 섞어 목표를 정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년 실적 전망과 관련해선 ‘신중론’이 우세했다.
내년 매출 전망과 관련해 10대 그룹 중 5곳이 ‘올해와 비슷할 것’이란 답을 내놨고 20% 미만 감소할 것이라고 답한 곳은 1곳이었다. 3곳만 ‘20% 미만 증가할 것’이라고 답했다.
영업이익과 관련해서도 비관론이 더 강했다. ‘증가할 것’이라고 답한 기업은 2곳뿐이었다. 나머지는 ‘올해와 비슷’(4곳), ‘20% 이상 감소’(2곳), ‘20% 미만 감소’(2곳) 등으로 보수적인 목표를 제시했다.
주력 사업의 업황이 ‘안갯속’인 영향이 크다. 삼성과 SK의 주력 사업인 메모리 반도체 부문은 최근 1년 넘게 이어진 불황의 터널을 지나 반등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스마트폰, TV 등 전자 제품은 회복세가 뚜렷하지 않다.
삼성, SK, LG가 미래 먹거리로 삼고 있는 전기차용 배터리 사업의 내년 업황과 관련해선 경고음도 울리고 있다.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이 줄면서 국내 배터리 기업이 완성차업체와 함께 세운 합작 공장의 가동률이 떨어졌고 신공장 가동 시점도 연기됐다. 경제계 관계자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017년 후 6년 만에 ‘서든 데스’(돌연사)를 화두로 들고나온 건 그만큼 내년 경영환경을 엄중하게 보고 있다는 의미”라고 평가했다.
금리 상승에 따른 비용 증가 우려
‘내년 경영실적과 관련해 가장 우려되는 변수’에 대해 응답(복수)을 받은 결과에선 ‘글로벌 인플레이션과 고금리’를 꼽은 비율이 42.1%(8곳)로 가장 높았다. 미국을 포함한 주요 국가에서 고금리 상황이 상당 기간 이어지며 소비 시장과 기업 실적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란 의미다. 대형 자동차기업 관계자는 “내년엔 글로벌 판매량을 더 늘려야 하지만 고금리 환경과 경기 둔화가 발목을 잡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주요 그룹 지주사 관계자는 “시장금리 상승에 따른 금융비용 증가 우려가 커졌다”고 설명했다.
‘각 지역의 전쟁·분쟁 심화’ ‘경제 블록화와 자국 우선주의’도 내년 경영의 핵심 변수로 꼽혔다. 기업 경영의 핵심인 공급망 구축과 관련된 비용을 높이는 요인으로 평가된다. 배터리업체 관계자는 “글로벌 분쟁에 따른 배터리·에너지 가격 변동성 확대와 탈세계화에 따른 공급망 변화 등을 주요 리스크로 예측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용은 줄이지 않겠다”
10대 그룹은 내년 투자도 올해에 이어 보수적으로 집행할 계획인 것으로 파악됐다. 내년 설비투자 규모에 대해 10곳 중 7곳이 “올해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할 것”이라고 답했다. 글로벌 경기 불확실성이 여전하기 때문에 제품 수급과 관련한 투자는 최대한 신중을 기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SK의 핵심 계열사인 SK하이닉스가 지난달 26일 열린 실적설명회에서 “내년 투자 증가폭을 최소화할 것”이라고 발표한 게 대표적이다.
미래 경쟁력과 직결되는 R&D와 관련해선 6곳이 ‘올해 수준 유지’ 계획을 세운 가운데 4곳은 ‘20% 미만 증액’을 택했다. 고용에 대해선 10대 그룹 중 8곳이 ‘올해 수준을 유지하거나 늘리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명예퇴직 등을 통한 적극적인 인원 감축’ ‘신규 채용 최소화를 통한 고용인원 축소’는 각각 1곳에 그쳤다.
황정수/김형규/빈난새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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