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시평] 렉서스를 박살 낸 올리브나무

2023. 11. 5. 17: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가자의 지옥도는 말한다
뿌리 뽑힌 자의 파괴는
세계화의 단맛을 압도한다
힘든 선택엔 입 닫는 정치
우리는 얼마나 다른가

로봇 손끝에는 매번 작은 고무방울이 달렸다. 뜨거운 고무로 차 앞 유리를 고정한 다음이었다. 로봇 팔은 다시 빙그르 돌아 미세한 금속 줄과 만난다. 줄은 고무방울을 완벽히 잘라낸다. 31년 전 도요타시 렉서스 공장에서 본 장면은 토머스 프리드먼의 머릿속에 각인된다. 돌아오는 총알 열차에서 신문을 읽던 그는 또 다른 세계와 마주한다. 기사는 팔레스타인 난민이 이스라엘로 돌아갈 권리에 관한 유엔 결의 해석을 놓고 중동에 서 일고 있는 분노를 전했다. 순간 기자는 깨닫는다. 냉전 후 세계의 절반은 더 나은 렉서스를 향해 뛰고 있었다. 다른 절반은 누가 어느 올리브나무를 차지할 것인가를 놓고 싸우고 있었다. 전자는 번영의 열망을 보여준다. 후자는 정체성의 뿌리를 상징한다.

지구촌은 오늘도 가자지구의 가장 끔찍한 전쟁을 지켜본다. 그 지옥도에 렉서스는 없다. 뿌리가 뽑힌 올리브나무가 렉서스를 박살 내고 말았다. 반세기 가까이 중동을 취재한 프리드먼은 하마스의 노림수를 바로 꿰뚫어 보았다. 유대인의 이스라엘과 이슬람의 발상지 사우디아라비아가 손잡으면 어떻게 될까. 하마스는 설 자리가 없다. 그 뒷배인 이란은 밀려난다. 극악한 테러는 렉서스를 바라보던 나라들이 화들짝 물러서게 하려는 것이었다. 초강경파 베냐민 네타냐후의 이스라엘이 과잉 대응할 것은 뻔했다. 무고한 사람들이 얼마나 잔혹하게 짓밟히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절규에 지구촌은 갈라졌다. 웃는 이는 우크라이나가 버거운 블라디미르 푸틴뿐이다.

첨단 기업의 나라 이스라엘은 렉서스가 상징하는 모든 걸 가졌다. 올리브나무에 대한 애착도 남다르다. 이 나라는 트릴레마를 안고 있다. 시온주의 지도자 다비드 벤구리온은 일찍이 현실을 직시했다. 유대민족의 나라를, 민주적으로, 이스라엘 땅 전체에 건설한다는 세 목표 중 두 가지만 실현할 수 있었다. 1967년 6일전쟁으로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을 점령한 이 나라는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이 이스라엘 땅을 다 차지하고 민주주의는 버릴 것인가, 이스라엘 전체에 민주 국가를 세우고 유대 국가는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민주적인 유대 국가이지만 옛 땅을 다 차지하지는 못하는 나라를 받아들일 것인가. 국제사회는 평화와 공존을 위한 두 국가 해법을 제시했다. 이스라엘 정치인들은 어려운 선택을 미뤄왔다. 30년 전 백악관 정원에서 팔레스타인 대표와 악수한 이스라엘 총리는 암살됐다. 그럴수록 팔레스타인 쪽에서는 오직 유대 국가의 완전한 제거만을 추구하는 극단주의 세력이, 이스라엘 쪽에서는 전부가 아니면 전무라며 점령지를 그대로 삼키려는 강경파의 목소리가 어떤 타협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바로 오늘의 지옥도다.

프리드먼은 세계화의 전도사였다. 렉서스를 향한 열망이 올리브나무에 대한 애착보다 커지는 세계를 보여줬다. 신냉전 시대의 분절로 그 그림은 흐릿해졌다.

한국은 세계화 시대에 렉서스처럼 질주했다. 그러나 잿더미의 가자는 올리브나무를 보는 새로운 성찰을 요구한다. 가자의 귀를 찢는 폭음이 호르무즈나 대만해협에는 어떤 파장을 미칠까. 우크라이나 재건이나 사우디아라비아의 미래 도시는 어떻게 될까. 그러나 우리의 물음은 그쯤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훨씬 근본적인 물음이 있다. 가자의 비극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검은 백조가 아니었다. 검은 코끼리처럼 눈에 뻔히 보이던 것이었다. 정작 힘든 선택에는 입을 닫는 정치인들이 애써 무시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더 안전하고 번영된 나라로 가려면 피할 수 없는 선택들이 있다. 그걸 모르는 정치인은 없다. 그들은 힘든 선택을 애써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장경덕 작가·전 매일경제 논설실장]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