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 민간 종자회사 억누르는 지자체 과욕

정혁훈 전문기자(moneyjung@mk.co.kr) 2023. 11. 5.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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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은 종자에서 시작된다. 종자를 농업의 반도체라고 부르는 이유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종자산업은 열악하다. 외국산 품종에 대한 의존도가 의외로 높다. 양파와 고구마, 사과, 포도, 배, 귤 등 주요 농산물의 외국산 품종 비중은 70~80%를 훌쩍 넘는다.

그나마 쌀과 보리 같은 식량작물은 종자를 정부와 지자체에서 직접 개발·보급한다. 식량 주권을 지키기 위한 보루다. 다만 공공부문에서 맡다 보니 개발된 품종 숫자에 비해 상업적으로 성공한 품종은 적다. 농촌진흥청과 각 도 농업기술원 연구자들이 품종 '개발'을 위해선 노력하지만 농가 '보급'엔 소홀한 탓이다. 한 예로 국내 최고의 쌀로 치는 경기미는 일본 고시히카리와 아키바레(추청) 품종에 기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문제의식을 갖고 고품질 벼 종자 개발에 매달린 육종가가 있다. 조유현 박사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25년째 벼 육종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개발한 대표 쌀 품종이 '진상'과 '골든퀸'이다.

고시히카리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된 진상은 여주 벼 재배 비중의 80%까지 올라섰다. 골든퀸은 새로 개발된 향미(香米) 계열이다. 어느덧 경기 화성 벼 재배지의 47%가 골든퀸으로 바뀌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다. 일반 쌀보다 20~30% 비싸게 팔리기 때문이다. 조 박사가 설립한 종자회사 시드피아는 덩달아 로열티 수입이 늘어나고 있다. 절묘한 것은 로열티를 농가가 아닌 유통업체에 부담시켰다는 점이다. 새 종자 도입에 보수적인 농민들을 움직이는 데 큰 힘이 됐다. 유통업체들도 로열티를 부담하고도 남는 장사를 한다. 소비자들은 새로운 풍미의 밥을 먹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로열티 수입은 또 다른 품종 개발에 투자돼 더 좋은 벼 품종을 개발하는 선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시드피아 사례는 농업계의 단비 같은 성과로 평가된다. 우리는 외환위기 때 국내 3대 종자회사를 해외로 팔아넘긴 아픈 경험이 있다. 이후 종자산업을 다시 일으키려 애써왔지만 신품종 개발에는 10~15년이 필요하다 보니 쉽지 않다.

그런데 느닷없이 도 농업기술원에서 골든퀸을 대체할 새로운 향미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맛과 향에서 골든퀸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도 않는다. 두 품종 간 특성 비교표를 만들어 작은 차이라도 돋보이려 애쓰고 있다. 알고 보니 그 품종 개발에 골든퀸 개발 노하우가 활용된 흔적이 역력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골든퀸 보급 초창기에 품종 홍보를 위해 종자 시료를 외부로 넘긴 것이 해당 품종 개발의 원천이 됐다는 주장이 나온다. 교배에 활용한 중간 소재 종자가 사실상 골든퀸과 같은 것이라는 게 업계 평가다.

시드피아는 이제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됐다. 유사 품종이 더 저렴하게 나오면 경쟁이 어렵다. 선순환 투자를 기대하기도 어려워진다. 그런데 수입 품종을 대체하면 모를까 민간 개발 품종을, 그것도 유사한 방식으로 개발해 지자체가 대체하겠다고 나서는 건 과욕이다. 민간 개발 품종을 굳이 지자체가 혈세를 들여 개발하는 것 자체가 예산 낭비다. 농업기술원 측은 농민들에게 로열티 부담을 줄여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미 로열티는 농민들 부담이 아닌 상황이다. 어렵게 나온 민간 종자업계의 성공 사례를 지자체가 억누르는 일은 없어야겠다.

[정혁훈 농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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