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태의 금서기행, 나쁜 책] 재미있어서, 두통 때문에, 심심풀이로 …'살인마 바이블'이 됐다
2000년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를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검붉은 피가 얼굴에 튄 한 남성이 입을 활짝 벌리고 웃는 장면이 유명한 작품이지요. 이 영화의 원작이 한 소설책이었고, 이 책이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판매금지 조치를 당한 문제작임을 아는 분은 적을 겁니다. 또 호주·캐나다 연쇄살인범들 자택 책장에서 '아메리칸 사이코'가 공통적으로 발견됐던 사실까지 아는 분은 더 적을 겁니다. 한때 '연쇄살인범들의 성경(聖經)'으로 불렸던 책 '아메리칸 사이코'의 진한 피 냄새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살덩이와 턱뼈가 뒤엉킨 녀석의 얼굴
'아메리칸 사이코' 주인공은 하버드대 출신이자 투자회사 고위직 임원인 26세 패트릭 베이트먼입니다. 출근길은 늘 그를 짜증 나게 합니다. 미국 뉴욕 풍경은 악취의 임계치를 넘어섰습니다. 길은 막히고, 택시 창밖으로 세어본 노숙자는 30명쯤. 뉴스에선 '목조주택 지붕에서 던져진 갓난아이, 산 채로 불태워진 짐승들, 에이즈에 감염된 야구선수, 마약에 중독된 아이' 같은 끔찍한 소식만 방송됩니다.
베이트먼 내면에는 살의와 성욕뿐입니다. 사실 그는 연쇄살인범입니다. 단지 재미를 위해, 두통을 잊기 위해 오락이자 심심풀이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추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베이트먼은 상대방 눈을 보고 대화하면서도 호주머니 속 톱니 모양 칼로 상대 복부에서 '내장을 꺼낼' 상상을 합니다. 첫 살인은 하버드대 학부생 시절이었습니다. 신입생이던 여자친구는 2학년으로 진급하지 못했습니다. 강둑 나뭇가지에서 '머리통만 머리카락이 묶인 채로' 발견됐거든요.
어느 날, 베이트먼은 회사 동료 폴 오언과 마주칩니다. 베이트먼은 오언이 늘 거슬립니다. 오언이 자신을 베이트먼이 아닌 다른 남성 동료 '마커스 홀버스탬'으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또 오언은 베이트먼과 외모도 비슷했습니다. 발렌티노 양복과 같은 브랜드의 뿔테 안경. 둘은 같은 미용실, 같은 디자이너에게 헤어스타일링을 맡겼습니다.
만취하여 몸을 가누지 못하는 오언을 집으로 초대한 베이트먼은 유행가를 틀어놓고 신문지를 바닥에 깝니다. 그리고 양복 위에 우비를 입은 뒤 소파에 앉은 오언의 얼굴 한가운데에 도끼를 내리꽂습니다. 그리고 베이트먼은 오언 집으로 갑니다. 그는 손목시계, 전기면도기, 모직 정장 등을 챙기고 오언이 런던 여행을 떠난 것처럼 연출합니다. 오언은 맨해튼에서 그렇게 '증발'했습니다.
오언의 죽음을 전후로 주인공 베이트먼의 살인충동은 성(性)충동과 엮이면서 점점 엽기적이고 가학적으로 변해갑니다. 베이트먼은 퉁명스럽게 답하는 여성 바텐더에게 "네 피를 가지고 놀고 싶다"며 욕을 하고, 길거리 창녀와 '콜걸'을 불러 3인 성관계를 합니다. 그러나 '평범한' 성관계가 아니었지요. 1달러 지폐를 구걸하던 무기력한 노숙자, 펫숍에서 구매한 애완견, 길거리에서 만난 꼬마를 베이트먼은 닥치는 대로 살해합니다.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살인을 과연 누가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요.
연쇄살인범 책장에서 발견된 금서
이처럼 '아메리칸 사이코'는 반사회성 성격장애가 있는 한 사이코패스의 '범죄 종합선물세트'와도 같은 책입니다. 그래서인지 1991년 '아메리칸 사이코' 출간 당시 각국 반응은 어떤 책보다도 격렬했습니다. 미국에선 당장 금서로 지정됐고, 출간 30년이 지난 현재도 미국 일부 도서관에선 금서입니다. 독일에서도 검열 끝에 판금 조치를 당했고, 호주에선 'R18+'(만 18세 이상만 열람 가능), 즉 성인만 독서 가능한 책으로 분류됐습니다. 작가는 살해 위협까지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1991년 호주 한 쇼핑몰에서 행인 8명을 칼로 죽인 범인이 현장에서 자살해 버리는 참극(스트래스필드 쇼핑몰 대학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경찰이 범인의 집을 조사해보니 '아메리칸 사이코'가 책장에서 발견됐습니다. 1992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선 여성 20명을 노예로 삼고 강간·살인한 남녀(심지어 부부)가 검거됐는데(버나도 호몰카 사건), 그들 집에서도 '아메리칸 사이코'가 발견됐습니다. 이 책이 '연쇄살인범의 성경'으로 불린 이유입니다.
소설 '아메리칸 사이코'가 한국에서 출간된 시기는 2009년으로, 다른 나라보다 좀 더 늦었습니다. 해당 출판사는 이 소설을 '19세 미만 구독 불가' 딱지를 붙이고 비닐 포장을 한 상태로만 판매했는데, 간행물윤리위원회는 잔혹한 묘사를 이유로 '유해 서적'으로 분류해 판매금지 조치를 합니다. '아메리칸 사이코'는 현재 19세 이상만 구매 가능합니다. 당시 책을 출간했던 출판사 황금가지에 물어보니 "당시 책을 편집했던 담당자가 '아메리칸 사이코' 한국어판 편집 과정에서 구토를 하고 울면서 진행했을 만큼 힘들어했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살인 고백'을 안 믿은 전담 변호사
인내심을 요구하는 '아메리칸 사이코'를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이 불가피해집니다. 왜 작가 브렛 이스턴 엘리스는 사이코패스 범죄를 이토록 끔찍하게 묘사했던 걸까요. 베이트먼이 소설에서 1인칭으로 고백하는 수십 건의 살인사건이 아예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입니다.
베이트먼은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깊어지자 그의 전담 변호사에게 죄악을 남김없이 털어놓습니다. 변호사는 의뢰인 베이트먼이 전화 메시지로 남긴 '살인 고백'을 전혀 믿지 않습니다. 변호사는 그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입니다.
변호사에게도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베이트먼이 자신을 자꾸 몰아세우자 점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변호사는 그제야 나직하게, 그러나 분명한 어투로 베이트먼에게 힘주어 말합니다. "이 멍청한 새끼야…왜냐하면…내가…폴 오언하고…저녁을…먹었거든…두 번이나…런던에서…바로 열흘 전에."(제2권 392쪽)
이제 두 가지 가설이 가능해집니다. ①베이트먼이 오언이라고 알고 지낸 남성이 오언이 아니었을 가능성 ②오언을 자신이 살해했다는 베이트먼 고백이 '거짓 환상(상상 속 살인)'이었을 가능성입니다. 가설 ①부터 살펴볼까요. '아메리칸 사이코'에선 뉴욕 최상류층 인물의 패션이 비슷한 데다 서로의 참모습에 관심이 없다 보니 서로가 서로를 다른 인물로 오해하는 것으로 자주 묘사됩니다. 즉 베이트먼이 죽인 사람이 오언이 아닌 다른 남성이라면 전담 변호사의 주장("열흘 전에 오언과 식사했다")이 성립됩니다.
하지만 가설 ②의 가능성도 근거는 충분합니다. 소설을 읽어보면 베이트먼이 변호사를 만난 이후 그의 살인 장면이 더는 기술되지 않고 있습니다. 살인이 '멈춘' 것이지요. 또 베이트먼은 변호사를 만난 직후 택시기사에게 시계와 지갑을 '빼앗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는 강자(피의자)에서 약자(피해자)로 바뀌었습니다. 이에 따른다면 베이트먼의 독백은 전부 거짓된 환상이고, 그의 상상에서 벌어졌던 살인은 가짜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습니다.
타인을 향한 존중과 관심이 사라진 시대,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까지 상실했습니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맨얼굴입니다. 타자를 향한 분노와 공격성이 베이트먼의 위험한 환상으로 표출된 것이지요. 인간이라는 종(種)은 현실보다 과장된 허구 속 비극을 관람함으로써 해방감을 맛보는 존재입니다. 현실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그리스 비극을 보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것처럼 말이지요. 예술은 픽션을 통해 세상의 구조적 모순을 이해하는 도구입니다. 베이트먼의 광란에 가까운 범죄 묘사는 인간에 대한 존중이 허물어지고 인간이 한낱 물질로 폄하되는 세계, 윤리적 인간과 도덕적 사회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어가는 현실을 더 선명하게 비춥니다. '아메리칸 사이코'는 그런 점에서 현실을 비추는 (반어적 의미에서의) '윤리적 거울'로 기능합니다. 비상식적이고 비합법적인 베이트먼의 행동을 독자이자 관객으로서 목격하고 나면 '살인 연극'을 대리 경험한 독자는 윤리적 기준이 완전히 망실된 우리의 세계, 인간이 쾌락을 위해 물질화되는 시대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지요.
빵 한 개의 무게, 그리고 인간의 윤리
'아메리칸 사이코'엔 뮤지컬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 포스터가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 영화에선 베이트먼의 자택에 포스터 한 점이 걸려 있고, 소설에선 3회 이상 '레 미제라블'이 언급됩니다. 이쯤 되면 우연한 장면이 아니지요.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은 고작 빵 한 개를 훔친 죄로 감옥에 갇혀야 했습니다. 반면 '아메리칸 사이코'의 주인공 베이트먼은 인간을 아무리 살해해도 단죄되지 않습니다. 빵 한 개의 무게가 지극히 무겁게 다뤄지고, 인간 목숨의 무게는 더없이 가볍게 여겨지는 시대인 것이지요. 결국 이런 질문이 가능해지겠지요. '인간이 인간이 아닌 시대,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린 걸까요?' 아마도 그건 우리가 지켜야 하는 무형의 마지노선, 바로 '윤리'가 아닐까요. 얇은 가면 몇 장을 바꿔 쓰면서 화를 억누른 채 숨을 참고 지내는 사람들, 그게 실은 우리 자신의 은폐된 민낯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짐승이 아닌 것은 베이트먼처럼 누군가를 살해하는 상상에 갇혀 사는 대신, 우리가 회복해야 할 윤리적 가치관을 공유하는 바로 그런 마지막 선의(善意) 때문일 겁니다. '아메리칸 사이코'는 그런 인간의 폭력성을 거울처럼 비추면서 우리를 고민하게 만드는, 영원한 '비윤리적' 문제작입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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