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아시아나 결합 심사 벼르는 EU [취재파일]
아시아나항공 이사회가 논란 속에 지난 2일 화물 사업 매각을 의결했다. 대한항공과의 기업 결합을 심사 중인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의 관심이 '독점 해소'였던 만큼, 남은 통합 작업이 탄력을 받을 거란 장밋빛 전망이 벌써부터 나온다. 반면, 차·포를 떼어내고 하는 통합이 과연 '메가 캐리어로서 시너지를 내겠다'는 애초 목적과 맞는 것이냐는 비판도 여전하다.
대한항공은 아시아나 이사회 의결 직후 EC에 해당 내용을 반영한 시정조치안을 제출했다. 아시아나를 상대로는 계약금·중도금 명목으로 입금해 묶어놨던 7,000억 원을 합병 승인 전에 우선 쓰도록 하고 전환사채(CB) 이자를 낮춰주는 자금 지원도 했다. 아시아나 채권단으로서 합병을 추동해온 산업은행은 "이사회 의결을 존중한다"며 환영했다.
까다로운 조건 내건 EU…KAL "티웨이에 여객 양도"
대한항공은 우선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유럽 알짜 노선 4곳의 슬롯(특정 시간대 운항 권리)을 타 항공사에 넘기겠다고 했다. 파리, 로마, 프랑크푸르트, 바르셀로나 노선을 저가항공사(LCC) 티웨이에 이양하겠다는 계획이다. EC는 위 계획을 근본적으로 '의심'한다. LCC 티웨이가 아시아나 같은 경쟁력 있는 사업자(Significant Competitor)를 대체해 영속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합당한 의문이다. A330 중형기 3대를 갖고 있을 뿐인 티웨이가 A350과 B777 같은 대형 기종을 띄워온 아시아나를 대체하긴 어렵다. 이에 대한항공은 항공기와 승무원을 티웨이에 넘기겠다는 방안을 내놨다. 조종사와 객실승무원 합쳐 100명 이상을 대형 기체와 함께 제공하겠다는 거다. 6월 파리부터 취항하는 게 목표라고 전해진다.
저가항공이 아시아나 대체?…'질적 검증' 벼르는 EU
여기에 몇 가지 문제가 잠재해 있다. 티웨이든 대한항공이든 인천발 노선 승객은 한국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10시간 넘는 고단한 유럽행을 LCC 타고 가겠다는 승객이 많지 않을 수 있다. 대한항공 조종사와 승무원이 있고 식사가 제공되지 않겠느냐고? 그 서비스 가격이 붙는 순간 저가항공이란 이름이 무색해질 것이다. 결국, 티웨이로 유상 여객 수를 몰아 채우기 위해 대한항공이 유럽 취항 횟수를 줄일지 모르는 일이다. 국내 1위 항공사에 입사했다가 졸지에 저가항공사에서 일하게 될 직원들의 반발 또한 예상된다.
논란의 화물…내년 7월까지 못 팔면 EU 맘대로
그런데 아시아나 화물 부문의 몸값이 만만찮다. 업계는 최대 7,000억 원 상당으로 추산한다. 인수자는 부채 1조 원까지 함께 떠안아야 한다. 아시아나 화물기 11대는 모두 19~32년 된 노후 기종으로 알려져 있다. 선뜻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중론이다. 엄경아 신영증권 연구위원은 "EU가 합병의 전제 조건으로 걸었던 게 화물 경쟁 해소였기 때문에 대한항공으로선 시간을 번 셈이지만 이 사업을 사갈 주체를 찾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1월 조건부 승인을 전제로 EC와 대한항공이 짜놓은 매각 시한은 내년 10월까지다. 초기 7개월은 대한항공이 주관한다. 문제는 그 뒤다. 대한항공이 인수자를 못 찾을 경우 매각 주도권은 EU로 넘어간다고 전해진다. EC가 매각 주관 수탁인(Divestiture Trustee)을 지정해 인수자를 찾게 된다. 이 경우 매각 금액에 '하한'은 없다. 최악의 경우 헐값에 급히 처분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아시아나항공 정상화'라는 애초 목적과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주주 반발이 불 보듯 뻔하다.
스스로 손발 자른 대한항공…'국내 대장'이 목표?
일각에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한항공이 스스로 손발 잘라가며 합병에 매진하는 거라고 주장한다. 외국 대형 항공사는 보통 자국 허브공항에서 슬롯 점유율이 절반 이상에 달하지만 대한항공의 경우 아시아나와 다 합쳐도 인천공항 슬롯의 40%에도 못 미친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싸우기보다 국내에서 대장 노릇 굳히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다. 아시아나 이사회 화물 매각 결의 직후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가 "대한항공 독점 강화와 아시아나항공 해체로 가는 길이 열렸다"고 비판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소비자로서도 국내 독점 항공사는 반가울 것이 없다. 한국 공정거래위원회가 10년간 가격 인상을 규제하는 조건으로 양사 합병을 승인하긴 했지만 경쟁 없는 환경에서 서비스 질 하락과 요금 인상은 '상식'이다.
시간만 끈 결렬은 최악…"플랜B 없다"는 산업은행
사실 모든 우려는 동종 업계 결합 시도 때부터 예상했던 바다. 하지만 채권단인 산업은행이 합병 무산에 대비한 '플랜B'를 마련했다는 얘기는 들려오지 않는다. 화물 매각을 결의한 지난 2일 이사회에서도 산업은행 관계자는 '경영단' 자격으로 참석해 매각 결의만 채근했다고 전해진다. 국가 항공 경쟁력에 대한 고민보다 당장의 공적 자금 회수가 급했던 것일까. 산업은행은 아시아나가 코로나 시기 1조 가까운 유동성을 확보했을 때도 "얼른 빚부터 갚으라"는 닦달을 했다고 아시아나 관계자는 전했다. 독자 생존이나 이종 업계 매각은 선택지에 없었던 셈이다.
국회도 비판…무엇을 위한 합병인가 돌아볼 때
이제 처음 통합을 말했던 주체들의 목표를 떠올려 볼 때다. 조원태 회장은 "대한민국 항공 산업을 지속적으로 성장시키고, 공적 자금 투입을 최소화"하기 위해 합병에 나선다고 말했었다. 이동걸 당시 산업은행장은 "국적 항공사 통합을 통해 국제 경쟁력을 최대한 높이겠다"고 말했다. 대한항공은 각국 경쟁 심사 과정에서 영국 히스로공항 주 7회 슬롯을 포기했고 중국엔 46개 슬롯을 반납했다. 애초 제시했던 목표와 지금의 현실은 많이 달라 보이는 게 사실이다.
국가 항공 경쟁력이 좌우되는 이번 사안에서 국토교통부나 공정거래위원회는 한 발 물러나 관망하는 분위기다. 강석훈 산업은행장이 "합병 진행 과정에서 아시아나 기업 가치가 많이 내려가는 게 사실"이라면서도 "합병을 재고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산업은행은 다른 산업에도 영향을 끼치는 항공 산업을 재편하면서도 매각 추진 단계에서부터 통합계획안(PMI, Post Merger Integration)을 공개하지 않았다"며 국민 세금이 뒷받침 된 공기업의 불투명성을 지적했다. 박 교수는 또 "지금처럼 항공사의 주요 무형 자산인 슬롯을 포기하고 화물을 분리하는 식이었다면 애초에 합병 아이디어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국회 및 국토부·공정위 등 관계 당국과 머리를 맞대 매각 중단 등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규 기자 laborstar@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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