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박정훈 명예회복과 해병 자존심 세우겠다” 전우들의 ‘50Km 행군’
“우리는 전우를 버리지 않습니다”
해병대 사령부서 국방부까지 행군
채모 상병 죽음 ‘진상 규명’도 요구
지난 4일 경기 화성시 해병대사령부 해병탑 앞. ‘해병대’가 크게 적힌 빨간 티를 입은 40여명의 해병대 예비역들이 이른 아침부터 한데 모였다.
‘젊은 피’에 속하는 30대부터 백발이 성성한 70대까지 연령대도, 삶의 궤적도 다른 이들은 이날부터 1박2일간 국방부가 위치한 서울 용산까지 50㎞에 달하는 거리를 행군하기로 했다. 폭우 뒤 실종자를 수색하다 숨진 채모 상병 사건을 수사하다 도리어 항명 혐의 등으로 기소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의 명예회복과 채 상병 죽음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기 위해서다.
‘고난에 타협하지 않는 해병대 50㎞ 정의의 행군’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행진은 박 대령의 동기인 해병대사관 81기 동기회가 주관했다. 첫날에는 경기 화성 해병대사령부 앞부터 경기 안양 인덕원역까지 30여㎞를, 이튿날에는 인덕원역에서 서울 용산 국방부 인근까지 20여㎞를 걷는 강행군이었다. 그럼에도 해병대 예비역들은 각지에서 한달음에 달려왔다.
30대부터 백발 성성한 70대 전우들 동참
경북 경산에서 새벽같이 올라왔다는 김용상씨(59)는 “25살, 23살인 두 아들도 해병대를 나와 채 상병이 자식 같은 마음이 든다”며 “국민들에게 채 상병의 죽음과 박 대령의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참여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6·25 참전 용사이고 아들도 해병대를 나와 3대가 해병대 출신이라는 남중경씨(60)는 “워커도 아닌 장화를 신고 무리한 수색전을 펼치다가 한 장병이 목숨을 잃었다”며 “지휘관이 책임지지 않는 모습에 해병의 자존심이 무너졌다. 그 자존심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 참여했다”고 했다.
“두 아들도 해병대 나와…채 상병 자식 같아”
경광봉을 든 지휘부와 경찰의 인솔하에 이들은 일사불란하게 이동했다. 장애물에 있을 때는 “우측에 자전거! 좌로 붙습니다!”라고 외치거나 좁은 길에선 “1열”을 외치는 모습에 “제대한 지 몇십년 만에 행군하는 기분”이라며 감회에 젖는 이들도 있었다.
“해병대는 전우를 버리지 않습니다. 도보가 어려우면 차가 준비되어 있으니 언제든지 말씀 주시라.” 운영진은 걷는 내내 일행들이 괜찮은지 살폈다. 15㎞쯤 걸은 후 “제가 제일 선임일 것”이라던 해병대사관 47기 A씨(75)가 “저는 여기까지 걷겠다. 후배들 수고하시라”고 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행군에는 해병대 예비역뿐 아니라, 이들의 가족과 일반 시민도 동참했다. 서울 관악구에 거주하는 해병대 예비역 지웅씨(46)는 부인 서민혜씨(42)와 동행했다. 서씨는 “행군은 처음이지만 운동을 좋아해 걷는 데 자신이 있다”며 “일반 국민이 봐도 박 대령이 억울할 것 같아 남편과 함께 왔다. 작은 마음이나마 응원이 됐으면 한다”고 했다. 시민으로서 행군에 동참한 이현동씨(51)는 “젊은 사람들이 길이나 군대에서 죽는 일이 계속 발생하는데, 규명이 안 되는 게 답답해 나왔다”고 했다.
해병대 예비역뿐만 아니라 가족, 일반 시민도 동참
이날 이들은 경기 수원시 서수원버스터미널에서 30분쯤 멈춰 시민들에게 지지 서명을 받았다. 5일에는 서울 동작구 사당역과 이수역에서 서명을 받았다. 기꺼이 서명에 동참한 시민들은 “남 일 같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수원 권선구 주민 이해숙씨(53)는 “오라버니와 남동생이 다 군 출신이라 아무래도 더 안타깝다. 요즘 세상에 자기 일처럼 나서는 저 해병대 출신들도 대단하다”고 했다.
해가 저문 4일 오후 6시 안양 시내에 접어든 이들은 ‘팔각모 사나이’ ‘브라보 해병’ 등 군가를 부르며 행진했다. ‘채 해병 순직 진상규명’ ‘박정훈 대령 명예회복’이 적힌 깃발을 등에 멘 채였다. 시민들은 “어디서부터 걸어오신 거냐”고 호기심을 갖기도, “잘한다!” “수고하십니다!”라며 응원의 화답을 하기도 했다.
시민들도 “잘한다, 수고하십니다” 응원으로 화답
오후 7시쯤 인덕원역에서 일정을 마무리한 이들은 5일 오전 인덕원역을 출발해 서울 용산구 국방부 인근에 오후 3시40분쯤 도착했다. 대장정은 오후 4시5분쯤 국방부 인근 70m쯤 앞까지 행진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날은 더 많은 예비역이 동참해 60여명이 대장정을 이어갔다. 오전에 내린 비로 한때 ‘우중행군’을 하기도 했지만 이들은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이들은 행군을 하는 동안 포스트잇에 모은 300여명의 서명을 한데 붙여 만든 ‘채 해병’ ‘박정훈’이라는 글자를 공개했다. 해병대사관 81기 동기회장 김태성씨는 행군을 마치며 “채 해병의 순직 이후 3개월간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제대로 고마운 인사를 못 했었다”며 “이번 행군에 동참해주신 많은 시민분들 덕분에 쉽지 않았던 행군이 더 힘이 났다”고 했다. 그러면서 “해병 정신은 ‘안 되면 될 때까지’”라며 “채 해병과 박정훈 대령이 잊힐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진상규명이 될 수 있도록 국민적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했다.
전지현 기자 jhyun@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프고 계속 커지는 켈로이드 흉터··· 구멍내고 얼리면 더 빨리 치료된다
- “남잔데 숙대 지원했다”···교수님이 재워주는 ‘숙면여대’ 대박 비결은
- [스경X이슈] 반성문 소용無, ‘3아웃’ 박상민도 집유인데 김호중은 실형··· ‘괘씸죄’ 통했다
- ‘해를 품은 달’ 배우 송재림 숨진 채 발견
- 윤 대통령 골프 라운딩 논란…“트럼프 외교 준비” 대 “그 시간에 공부를”
- ‘검찰개혁 선봉’ 박은정, 혁신당 탄핵추진위 사임···왜?
- 한동훈 대표와 가족 명의로 수백건…윤 대통령 부부 비판 글의 정체는?
- “그는 사실상 대통령이 아니다” 1인 시국선언한 장학사…교육청은 “법률 위반 검토”
- 3200억대 가상자산 투자리딩 사기조직 체포… 역대 최대 규모
- 머스크가 이끌 ‘정부효율부’는 무엇…정부 부처 아닌 자문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