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피를 가지고 놀고 싶다”…‘연쇄살인마의 성경’으로 불린 이 책 [나쁜 책]
2000년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를 기억하시는 분들 계실 겁니다. 검붉은 피가 얼굴에 튄 한 남성이 입을 활짝 벌리고 웃는 장면이 유명한 작품이지요.
이 영화의 원작이 한 소설책이었고, 이 책이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판매금지 조치를 당한 문제작임을 아시는 분은 적을 겁니다.
또 호주·캐나다 연쇄살인범들 자택 책장에서 ‘아메리칸 사이코’가 공통적으로 발견됐던 사실까지 아시는 분은 더 적을 겁니다.
한때 ‘연쇄살인범들의 성경(聖經)’으로 불렸던 책, 한번 읽고 나면 잘 지워지지 않는 얼룩 같은 책, 오늘은 브렛 이스턴 엘리스 장편소설 ‘아메리칸 사이코’의 진한 피냄새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출근길은 늘 그를 짜증나게 합니다. 뉴욕 풍경은 악취의 임계치를 넘어섰습니다. 길은 막히고, 택시 창밖으로 세어본 노숙자는 30명쯤. 뉴스에선 ‘목주택 지붕에서 던져진 갓난아이, 산 채로 불태워진 짐승들, 에이즈에 감염된 야구선수, 마약에 중독된 아이’와 같은 끔찍한 소식만 방송됩니다.
베이트먼 내면에는 살의와 성욕 뿐입니다. 사실 그는 연쇄살인범입니다. 단지 재미를 위해, 때로 두통을 잊기 위해 오락이자 심심풀이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추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베이트먼은 상대방 눈을 보고 대화하면서도, 호주머니 속 톱니 모양 칼로 상대 복부에서 ‘내장을 꺼낼’ 상상을 합니다. 첫 살인은 하버드 학부생 시절이었습니다. 신입생이었던 여자친구는 2학년 진급을 못 했습니다. 강둑 나뭇가지에서 ‘머리통만 머리카락이 묶인 채로’ 발견됐거든요.
오언이 자신을 베이트먼이 아닌 다른 남성 동료 ‘마커스 홀버스탬’으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또 오언은 베이트먼과 외모도 비슷했습니다. 발렌티노 양복과 같은 브랜드의 뿔테 안경. 둘은 같은 미용실, 같은 디자이너에게 헤어스타일링을 맡겼습니다.
만취하여 몸을 가누지 못하는 오언을 집으로 초대한 베이트먼은 유행가를 틀어놓고 신문지를 바닥에 깝니다. 그리고 양복 위에 우비를 입은 뒤 소파에 앉은 오언의 얼굴 한가운데에 도끼를 내리꽂습니다.
두상에서 분출된 피가 베이트먼 우비를 뜨겁게 적십니다. 대여섯 건의 살인 장면이 끔찍할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되는 이 소설에서, 이해를 돕고자 극히 일부만 인용합니다.
◎ “두꺼운 도끼날이 오언의 벌린 입을 양옆으로 가르며 입을 막아 버린다. 얼굴이 쩍 하고 갈라지면서 쌍둥이 간헐천처럼 피가 뿜어져 나와 우비에 튄다. 오언의 골에서 새어나는 압력 때문에 방귀소리 비슷한 무례한 소음이 뒤를 잇더니 분홍빛의 미끌거리는 골이 쪼개진 얼굴 쪽으로 흘러나온다. 입은 치아와 살덩이와 턱뼈가 뒤얽혀 난장판이다.” (제2권 46~47쪽)
오언의 죽음을 전후로, 주인공 베이트먼의 살인충동은 성(性)충동과 엮이면서 점점 엽기적이고 가학적으로 변해갑니다. 베이트먼은 퉁명스럽게 답하는 여성 바텐더에게 “네 피를 가지고 놀고 싶다”며 욕을 하고, 길거리 창녀와 ‘콜걸’을 불러 3인 성관계를 합니다. 그러나 ‘평범한’ 성관계가 아니었지요.
◎ “한 시간 후면 나는 성급하게 두 여자를 정문으로 몰아 댈 것이고, 옷을 입은 둘은 피는 흘리고 있지만 돈은 넉넉히 받아 갈 것이다. 내일쯤 사브리나는 절름발이가 되어 있겠지. 크리스티는 아마 눈에 끔찍하게 멍이 들 테고 옷걸이 덕에 볼기짝에는 깊은 생채기가 날 것이다. 침대 주위로는 이탈리아제 빈 소금통 하나와 피 묻은 클리넥스 티슈가 구겨진 채로 흩어져 있을 것이다.” (제1권 354쪽)
길거리 개의 두 앞발을 ‘한 번의 강한 동작’으로 부러뜨리고 가는 길, 베이트먼은 맥도널드에서 바닐라 밀크 셰이크를 주문합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행인 얼굴에 ‘총알 두 방’을 먹인 직후엔, 시리얼 한 통을 구매한 베이트먼이 휘파람을 붑니다.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살인은 과연 누가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요.
그래서인지 1991년 ‘아메리칸 사이코’ 출간 당시 각국 반응은 어떤 책보다도 격렬했습니다.
미국에선 당장 금서로 지정됐고, 출간 30년이 지난 현재도 미국 일부 도서관에선 이 책이 금서입니다. 독일에서도 검열 끝에 판금 조치를 당했고, 호주에선 ‘R18+(만 18세 이상만 열람 가능)’, 즉 성인만 독서 가능한 책으로 분류됐습니다.
너무 끔찍한 나머지 작가는 살해 위협까지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1992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선 여성 20명을 노예로 삼고 강간·살인한 남녀(심지어 부부)가 검거됐는데(버나도 호몰카 사건), 그들 집에서도 ‘아메리칸 사이코’가 발견됐습니다. 이 책이 ‘연쇄살인범들의 성경’으로 불린 이유입니다.
법정 소송 끝에 ‘아메리칸 사이코’는 현재 19세 이상만 구매 가능합니다. 당시 책을 출간했던 출판사 황금가지에 물어보니 “당시 책을 편집했던 담당자가 ‘아메리칸 사이코’ 한국어판 편집 과정에서 구토를 하고 울면서 진행했을 만큼 힘들어 했던 소설”이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책의 마지막 대목에 이르면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바로, 베이트먼이 소설 속에서 1인칭으로 고백하는 수십 건의 살인사건이 아예 처음부터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입니다. 다시, 소설의 안쪽으로 들어가 봅니다.
변호사에게도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베이트먼이 자신을 자꾸 몰아세우자, 점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변호사는 그제서야 나직하게, 그러나 분명한 어투로 베이트먼에게 힘주어 말합니다. “이 멍청한 새끼야… 왜냐하면… 내가… 폴 오언하고… 저녁을… 먹었거든… 두 번이나… 런던에서… 바로 열흘 전에.” (제2권 392쪽)
이제 두 가설이 가능해집니다. ① 베이트먼이 오언이라고 알고 지낸 남성이 오언이 아니었을 가능성, ② 오언을 자신이 살해했다는 베이트먼 고백이 ‘거짓 환상(상상 속 살인)’이었을 가능성입니다.
하지만 가설 ②의 가능성도 근거는 충분합니다.
소설을 읽어보면, 베이트먼이 변호사를 만난 이후 그의 살인 장면이 더는 기술되지 않고 있습니다. 살인이 ‘멈춘’ 것이지요. 또 베이트먼은 변호사 만남 직후 택시기사에게 시계와 지갑을 ‘빼앗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는 강자(피의자)에서 약자(피해자)로 바뀌었습니다. 이에 따른다면 베이트먼의 독백은 전부 거짓된 환상이고, 그의 상상 속에서 벌어졌던 살인은 가짜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습니다.
타인에 대한 존중과 관심이 사라진 시대,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까지 상실했습니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맨얼굴입니다. 타자에 대한 분노와 공격성이 베이트먼의 위험한 환상으로 표출된 것이지요. 인간의 끝도 없는 소유욕, 인간의 비인간화라는 주제의 중심에 주인공 패트릭 베이트먼이 자리합니다.
베이트먼의 광란에 가까운 범죄 묘사는 인간에 대한 존중이 허물어지고 인간이 한낱 물질로 폄하되는 세계, 윤리적 인간과 도덕적 사회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어가는 현실을 더 선명하게 비춥니다. ‘아메리칸 사이코’는 그런 점에서 현실을 비추는 (반어적 의미에서의) ‘윤리적 거울’로 기능합니다.
비상식적이고 비합법적인 베이트먼의 행동을 독자이자 관객으로서 목격하고 나면, ‘살인 연극’을 대리 경험한 독자는 윤리적 기준이 완전히 망실된 우리의 세계, 인간이 쾌락을 위해 물질화되는 시대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아메리칸 사이코’의 잔혹성 묘사를 이해하는 하나의 길일 겁니다.
책 ‘아메리칸 사이코’는 발표 후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등장 여성들 대다수가 이성적 사고력이 결여된 인물로 그려진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비판에 앞장섰던 페미니스트가 미국 작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이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녀가 바로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주인공으로 낙점되는 크리스찬 베일의 어머니였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또 소설 속에서 한 인물이 주인공 베이트먼을 “배트맨 같은 호색한”(제2권 23쪽)이라고 비꼬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의 크리스찬 베일이 훗날 ‘다크나이트 트릴로지(3부작)’에서 주인공 배트맨 배역을 맡는다는 점도 역시 흥미롭습니다. 소설 ‘아메리칸 사이코’ 발표가 1991년,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개봉이 2000년, 영화 ‘배트맨 비긴즈(다크 나이트 첫 작품)’ 개봉이 2005년임을 감안하면 마치 어떤 예언과도 같은 문장이지요. (크리스찬 베일이 ‘사이코’ 베이트먼의 악과, ‘수호자’ 배트맨의 선을 동시에 연기했다는 점도 흥미진진합니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은, 고작 빵 한 개를 훔친 죄로 감옥에 갇혀야 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한 신부님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살아야 했습니다.
반면 ‘아메리칸 사이코’의 주인공 베이트먼은 인간을 아무리 살해해도 단죄되지 않습니다. 살인범이라는 그의 정체는 거대한 도시 속에서 희미하게 감춰집니다.
아마도 그건 우리가 지켜야 하는 무형의 마지노선, 바로 ‘윤리’가 아닐까요. 얇은 가면 몇 장을 바꿔쓰면서 화를 억누른 채 숨을 참고 지내는 사람들, 그게 실은 우리들 자신의 은폐된 민낯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짐승이 아닌 이유는, 베이트먼처럼 누군가를 살해하는 상상에 갇혀 사는 대신, 우리가 회복해야 할 윤리적인 가치관을 공유하는 바로 그런 마지막 선의(善意) 때문일 겁니다.
‘아메리칸 사이코’는 그런 인간의 폭력성을 거울처럼 비추면서 우리를 고민하게 만드는, 영원한 ‘비윤리적’ 문제작입니다.
※다음주에는 도리트 라비니안 소설 ‘All The Rivers’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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