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의 브랜드, LG家의 라벨…그러나 칠레 ‘술’ [김기정의 와인클럽]
김기정의 와인클럽 23- 예술을 담은 와인(2)
지난달 민화 작가 소혜 김영식이 작품활동 30여 년 만에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전시 제목이 ‘화담(畵潭)-민화를 담다’입니다. 김 작가는 고(故) 구본무 LG 회장의 부인입니다. 구 회장의 호가 화담(和談)입니다. 남편을 추모하는 뜻에서 남편의 호를 전시 제목에 활용했다고 합니다. 이번 전시회에는 ‘사랑’을 한글과 영문(LOVE), 한자(愛)로 각각 구성한 문자도와 함께 달항아리 시리즈가 주목받았습니다. 지난 8월 롯데칠성음료가 출시한 와인 ‘마주앙 달항아리’에도 김영식 작가의 ‘달항아리’가 라벨에 들어 있습니다.
이번 주 김기정의 와인클럽은 지난주에 이어 ‘예술을 담은 와인’ 두 번째로 한국 작가의 작품을 담은 와인들을 소개합니다.
김 작가를 민화의 길로 이끈 것은 신사임당의 ‘초충도’라고 합니다. 초충도는 ‘풀과 벌레를 소재로 그린 그림’을 뜻합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강릉의 오죽헌박물관에 보존돼 있는데 5만원권 지폐 앞면에 신사임당 초상과 함께 초충도 중 ‘가지’ 그림이 삽입돼 있습니다. 초충도를 보고 민화의 매력에 빠진 김 작가는 본격적으로 민화에 입문하면서 국내 유명 작가들로 부터 가르침을 받습니다. 김 작가는 현대민화공모전 특선, 대한민국 전통공예대전 특별상 등 다수의 상을 받았습니다.
출시 초기엔 마주앙에 국산 포도로 만든 와인을 담았습니다. 수입와인이 쏟아지면서 마주앙은 국내 소비자들로 부터 외면을 받습니다. 와인 양조용 포도 농사도 쉽지 않았고 무엇보다 국산 와인의 품질이 상대적으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현재 마주앙은 ‘미사주’를 제외하곤 한국산 포도가 아닌 수입와인을 사용합니다. ‘마주앙 달항아리’ 역시 엄밀히 말하면 한국 와인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칠레산 와인이 담겼습니다. 와인 자체는 굉장히 품질이 좋습니다. 프랑스 보르도의 5대 샤토 가운데 하나인 샤토 마고가 투자한 칠레 와이너리가 만든 것으로 가격대비 훌륭한 맛을 내는 좋은 평판을 유지하는 와인입니다.
그러나 와인의 라벨과 브랜드에는 그 와인 정체성과 와인을 만드는 생산자의 철학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롯데칠성음료는 ‘마주앙’을 왜 만드는 걸까요? ‘마주앙’이란 브랜드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지난번 김기정의 와인클럽에서 소개한 비비 그라츠는 자신의 ‘예술가’적 정체성과 이탈리아 특유의 ‘유머’를 라벨과 이름에 담았습니다. 구강성교를 뜻하는 ‘질식’(소포코네·Soffocone)이라는 다소 야릇한 이름과 라벨 디자인으로 화제를 모았지만 그의 와인은 ‘산지오베제’라는 이탈리아 고유 포도품종을 고집했다는 점에서 더 큰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메를로 등의 글로벌 포도품종으로 만들어 ‘슈퍼 투스칸’이란 이름으로 팔았으면 좀 더 쉽게 판매가 됐었을 겁니다. 비비 그라츠가 어려운 길을 택한 만큼 그 가치를 인정하게 됩니다.
전시장에서 박 화백이 영상을 통해 “스트레스로 병든 사회에서 사람을 치유하는 게 예술의 역할”이라고 말하는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신세계그룹의 와인수입업체 신세계L&B가 한국의 작가들과 협업해 2018~2020년 ‘아트앤와인’시리즈를 진행했습니다. 신세계 L&B가 한국에 수입하는 와인의 라벨에 한국 작가의 작품을 넣은 겁니다.
박서보 화백의 ‘Erriture(묘법) No.170903’은 미국 와인 ‘부커’에 들어 있습니다. 프랑스 와인 이기갈의 라벨에선 김창열 작가의 1974년작 물방울, 호주 와인 투핸즈에선 윤명로의 2009년작 바람부는 날 IX-920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미국 나파밸리 와인 시부미 놀에는 샤르도네, 피노 누아, 카베르네 소비뇽 등 3개 포도품종 와인에서 각기 다른 황규백 화백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하종현 화백의 작품 ‘Conjunction 07-09’를 라벨에 담은 와인은 미국 나파밸리 와인 ‘부켈라’입니다.
샤토 무통 로칠드 2013년 빈티지에는 한국 작가 이우환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샤토 무통 로칠드 2013년 빈티지를 볼 때 마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이유입니다. 지난 2월 파리에서 열렸던 와인박람회 ‘비넥스포’의 샤통 무통 로칠드 전시관에는 빈티지별로 와인을 전시해 놓았는데 그곳에서도 이우환 화백의 작품이 들어간 2013년 빈티지 샤통 무통 로칠드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우환 이후 샤토 무통 로칠드의 라벨에 오를 한국 작가는 누가 될까요.
저는 샤토 무통 로칠드가 네이버나 카카오 웹툰 작품을 ‘라벨’로 써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샤통 무통 로칠드는 그 시대와 호흡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와인 라벨로 선정했습니다. 지금 프랑스 파리를 비롯해 유럽에는 한국 웹툰 작가들의 작품이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롯데의 ‘마주앙’이라는 브랜드, LG가(家)의 민속화 달항아리 라벨까지는 좋았는데, 그 안에 외국산 와인을 담았다는 점이 무척이나 아쉽습니다. 외면받던 마주앙이란 브랜드를 소비자에게 알리기 위해 가성비 좋은 해외 와인을 쓰는 브랜드 전략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앞으로는 수입 와인 대신 한국산 와인을 마주앙에 담으면 더 의미가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롯데칠성음료가 직접 포도밭을 경작하지 않아도 한국에서 생산되는 와인 중 해마다 가장 좋은 와인을 심사해 ‘마주앙’ 와인으로 병입하는 방법도 있을 겁니다.
물론 한국산 와인의 품질에 대한 우려가 여전히 있습니다. 틀림없이 세계 최고 수준의 와인과는 격차가 있습니다. 일단 한국이 와인 산지로는 좋은 기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 와인의 품질도 예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지난 9월 열린 아시아 와인 트로피(Asia Wine Trophy)에서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와인들과 함께 한국산 화이트 와인을 심사했습니다. 저뿐 아니라 함께 심사에 참여했던 해외 와인 관계자들도 한국산 화이트 와인을 마셔보곤 “한국 와인의 양조 수준이 상당히 높이 올라와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돈을 벌고 사업을 해야 하는 기업에 ‘의미’만 강조하는 건 무리한 요구일 수 있습니다. 동시에 ‘롯데’니까 진짜 한국산 와인을 마주앙에 담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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