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스전구·마르크스‘자본’과 이어진 설탕·커피·모피 이야기···‘자연의 악’[책에서 건진 문단]
‘책에서 건진 문단’(책건문)은 경향신문 책 면 ‘책과 삶’ 머리기사의 확장판 이름입니다. 지면 서평은 ‘지면 제약’ 때문에 한두 문장만 인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책건문’은 문단 단위로 내용을 소개합니다. 지면 서평도 더 쉽게 자세하게 풀었습니다. 지은이 뜻을 더 정확하게 전하려는 취지의 보도물입니다. 경향신문 칸업 콘텐츠입니다. 책 문단을 통째로 읽고 싶으시면 로그인 해주세요!
카를 마르크스 후원자로 유명한 이는 친구 프리드리히 엥겔스죠. 마르크스가 런던에서 <자본>을 쓸 때 재정 지원을 한 이가 또 있습니다. 어머니쪽 친척 리온 필립스입니다. 필립스는 네덜란드에 담배 공장과 커피 유통 회사를 세웠죠. 손자도 회사를 만듭니다. 세계 최대 전구 회사인 ‘필립스’입니다.
네 번째 ‘책건문’ <자연의 악>(알렉산드르 옛킨트 지음·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저자는 “그 커피와 담배의 작은 일부는 <자본>이라는 텍스트로 전환되었던 것”이라고 썼습니다.
존 드울프라는 미국인 함장은 19세기 초 니콜라이 레자노프라는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탐험대 사령관이자 차르의 대리인에게 담배와 럼주를 실은, 대포 8문이 장착된 선박을 팝니다. 레자노프는 회사 약속어음과 해달 가죽 572개로 대금을 치렀습니다. ‘유명인’ 한 명이 또 나옵니다. 드울프의 조카가 <모비 딕>을 쓴 허먼 멜빌입니다. 드울프는 조카에게서 고래, 여행, 결단력에 관해 배웠다고 하네요.
‘모피를 거래했다’에 담긴 잔혹한 역사
그저 유명인 관련 일화로 여길 일은 아닙니다. 역사책이나 경제학책에서 흔히 보는 ‘모피를 거래했다’는 짧은 서술엔 잔혹한 역사가 담겼습니다.
해달 7만3000마리, 비버 3만 마리, 흑담비 3만 마리에다 100만 마리가 넘는 여우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물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가 19세기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등지에서 잡아 죽인 동물 숫자입니다.
동물들은 화폐였죠. 해달 가죽으로 배를 사고판 데서 어느 정도 가치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아메리카는 아메리카산 제품은 알래스카 모피와, 모피는 중국산 차와 교환했습니다. 차는 러시아제국과 아메리카에서 팔렸죠.
저자는 러시아-아메리카가 “국가와 민간 파트너십을 기반으로 하는 또 하나의 자원 지향적 팽창 기관”이라고 말합니다. ‘자원 지향 팽창’의 대가는 생명입니다. 당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탐험선 소속 의사 게오르크 랑스도르프는 “러시아인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모든 것을 살해한다. 그들은 자기네가 잠재적 부의 원천을 영구히 파괴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고 썼습니다.
17~19세기 사람을 포함한 ‘움직이는 것’들이 수없이 죽어 나갔습니다. 19세기 중엽 선교사 인노켄티 베니아미노프는 1766년 이반 솔로비예프와 그의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킨 알류트족의 절반 이상인 약 3000명을 살해했다고 폭로하기도 했죠.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모피를 의복과 주거용 단열재로만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공정한 가격이나 이윤및 축적에 대한 개념이 없었을 뿐 아니라 모피 동물을 대규모로 사냥하는 데에도 관심이 전무했다. 어민과 순록 목축업자들을 덫을 놓거나 사냥하는 자들로 변모시키려면 무력을 동원해야 했다. 공식적으로 튀르크어 야삭(yasak)이라 알려져 있던 모피 공물은 비러시아 민족과 비정교도 민족에게만 부과되었다. 야삭 모피는 시베리아 남서부 도시 토볼스크로 운반되었다. 그곳은 모피와 물자를 보관하는 요새화한 창고인 자체적 특색이 있는 성채(Kremlin)를 두고 있었다. 가죽은 거기서 등급을 매기고 가격을 책정한 뒤 썰매 호송대에 실어 겨울 도로를 달려 모스크바 크렘린궁으로 보냈다
주크치·캄차달·코랴크족 등 많은 부족이 ‘모피 무역’에 저항합니다. 러시아인들은 공개적 태형에서부터 대량학살에 이르기까지 잔혹한 방법으로 보복합니다. 지역 주민들에게서 가죽을 빼앗는 일반적 방법은 인질극 ‘아마나트(amanat)’입니다. 정복자들은 남성들이 야삭(공물)을 낼 때까지 여성과 어린이들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인질극과 학살로 획득한 원자재들
1788년 코사크인들은 알류트족 어린이 500명을 인질로 삼았습니다. ‘계몽주의자’인 예카테리나 2세 등 러시아 통치자들은 이 방법을 승인합니다. 시베리아 역사가 니콜라이 야드린체프는 1882년 현존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은 시베리아 민족 수를 헤아렸다. 캄차달족은 인구의 90%, 보굴족은 인구의 50%를 잃었습니다.
20세기 초에도 시베리아의 모피 무역이 이뤄졌습니다. 또 다른 한 명의 유명인이 등장하죠. 젊은 레온 트로츠키입니다. 시베리아 망명기인 1900~1902년까지 퉁구스족과 보드카·면직물을 모피와 교환하던 상인 야코프 체르니흐(Yakov Chemykli) 밑에서 일했죠. 수천 명의 노동자를 거느렸는데, 트로츠키는 “그는 절대 독재자였다”고 썼습니다.
볼셰비키도 모피 무역에 의존했다고 합니다. 예이턴곤 가문의 구성원들은 소련의 대미 모피 수출을 쥐락펴락했는데, 그 일원 레오니드는 소련 비밀경찰 NKVD에 소속된 장군이기도 했습니다. 트로츠키 암살을 조직한 인물이죠.
책엔 자연과 사람에 대한 착취와 수탈, 폭력의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저자는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은 발트해 연안 지역이 유럽의 ‘내부 아메리카’라고 지적한 점을 인용합니다. 지주들은 농민으로 하여금 여름에는 밭에서 일하고 겨울에는 나무를 베도록 강요했습니다. 노동을 강제하려 잔혹한 무력을 동원했습니다. 외국 선박들이 목재를 운송했습니다. 무역 수익의 대부분은 네덜란드와 영국의 상인들 호주머니로 들어갑니다.
야망, 변덕, 실수, 탐욕에 얽힌 원자재
책 주인공은 “인간이 지표면이나 땅속 깊은 곳에서 추출하는 모든 것”인 금속, 농산물, 육류, 에너지, 곡물 같은 원자재(raw materials)입니다. “우연한 발견, 장거리 여행, 성공적 모험, 또는 그렇지 않으면 재난과 관련된 물질”입니다.
저자는 각 국가와 원자재들이 맺은 ‘특별한 관계’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원자재는 “통치자의 야망, 자연의 변덕, 과학자의 실수, 관리자의 탐욕”과 “광산·유전·시추공과 밀월 관계를 맺는 군주들” 이야기와도 이어집니다. 저자는 각국의 “지배적인 주요 산물이 어떻게 문화적 상상력을 좌지우지하고 그것의 상징과 물신화 대상에 영향을 끼치는지, 그리고 그 왕국의 제2의 몸을 형성하는지 증명”하려 한다.
문화? 흑담비 가죽으로 테를 두른 모노마흐 모자가 러시아 차르의 최고 권력 상징물이었다는 게 작은 사례입니다. ‘커피하우스’도 문화적 사례입니다.
저자 문제의식에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원자재는 ‘설탕’입니다. 설탕과 소금의 차이로 풀어갑니다.
사람들은 소금을 포만(satiety) 수준까지만 소비한다. 즉 소금을 소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우리 몸은 소금이 어느 정도 필요한지 알고 있으며, 너무 적거나 많은 양의 소금은 불편함을 유발한다. 모든 인구에게는 그러한 자원의 최적 가격을 정의하는 균형점이 존재한다. 이러한 종류의 자원은 1인당 소비량이 안정적이라 인구가 증가해야만 소비량이 늘어난다. 이 경우에는 수요와 공급의 균형(equilibrium)에 초점을 맞춘 경제학이 작동한다. 하지만 설탕은 그와는 다른 종류의 자원이다. 개인이나 국가는 설탕을 무한정 소비할 수 있는 것이다. 소비자는 더 많은 양의 설탕을 이용할 수 있으면 그것을 더 많이 원하게 된다. 공급 증가는 한층 더 큰 수요를 불러일으킨다. 나는 이런 종류의 상품을 ‘중독성(addictive)’ 상품이라 부르려 한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수요가 공급을 좌우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다. 즉 생산이 소비를 자극한다. ‘포만’, 즉 수요와 공급 사이의 ‘균형’은 이루어지지 않거나 항상 미래로 유예된다. 대신 의존성이 증가할 뿐 아니라 채울 수 없고 채워지지 않는 욕구, 즉 중독이 발생한다.
중독성 상품은 설탕과 설탕으로 생산하는 알코올뿐 아니라 향신료·담배·커피·초콜릿·아편 등입니다. 저자는 설탕에서 아편에 이르는 소모품을 ‘소프트 드러그(soft drugs)’로 규정한 인류학자 마셜 살린스의 견해도 따릅니다.
‘중독성 상품’이자 ‘소프트 드러그’인 설탕의 잔혹사
18~19세기 중독성 물질이 국제 무역에서 가장 큰 상품 집단을 구성합니다. 저자는 “세상의 부는 설탕 같은 중독성 상품에 의존했다”고 말합니다. “설탕·담배·차·코코아·커피 수익은 노예무역, 식민지 합병, 전쟁 참여를 자극했다”고도 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는 이 제품들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이국적이고 사치스럽게 여겨졌던 그 제품들은 점차 대중이 소비할 수 있을 만큼 저렴한 품목으로 변신했다. 그것들은 사교성을 높이고, 배를 채워주며, 의존성을 유발하고, 이윤을 창출하며, 대체로 교회와 국가의 비난을 피해갔다. 잉글랜드에서 아편은 난봉꾼의 전유물로 전락했지만, 설탕이 든 차, 담배 한 자밤, 커피 한 잔, 초콜릿 한 조각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었다. 이 중독성 강한 제품 묶음의 중심에는 설탕이 버티고 있었다. 돌비 토머스는 북아메리카 남부 식민지들에게 뉴잉글랜드가 아닌 서인도제도의 선례를 따르라고 공개적으로 조언했다. 설탕을 더 많이 생산하고 노예를 더 많이 수입하라고 말이다. 그러나 사탕수수는 대륙 식민지들에서는 잘 자라지 못했다. 심지어 루이지애나조차 사탕수수가 자라기에는 겨울이 너무 추웠다. 그 달콤함의 시대에, 이곳이 떠안은 주요 역할은 서인도제도에 식량을 공급하는 일이었다. 검은 노예들이 횐 설탕을 생산하는 그 섬들에는 식량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여유 땅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륙 본토 식민지들은 설탕 섬들에 필요한 온갖 염장 생선과 대부분의 귀리·곡물·밀가루·목재 ·말·양 따위를 제공했다. 농장주들은 본토의 농부 ·어부. 대장장이에게 설탕·럼주·당밀로 그 상품들의 대금을 치렀다. 좁은 영토에서 전례 없는 자금 흐름을 확보한 이 설탕 섬들은 아메리카 식민지, 영국의 섬유 산업, 영국 왕립 해군에 자금을 대줄 수 있었다.
잉글랜드로 돌아간 서인도제도 농장주들은 런던 타운하우스나 시골 영지를 사들입니다. 이들의 자녀는 해로나 이튼 같은 학교로 갔죠. 커서는 귀족 집안과 혼인했습니다. 의원·장관·시장이 됩니다.
중독성 상품들은 농촌 가계도 바꿉니다. 저자는 역사가 에릭 홉스봄을 인용하며 설탕이나 담배, 커피, 차 같은 중독성 상품들이 농촌 가계를 전(前)산업 자본주의라는 고속도로로 이끌었다고 말합니다. “유사 중독적 의존성을 유발하는 이 상품들은 사람들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득 이상을 벌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그 상품들의 가격이 저렴해질수록 그것들이 가계 예산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커졌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중독성 상품은 전체 영국 수입품 가운데 4분의 1을 차지했습니다. 이 무역을 통해 영국은 식민지 지출금을 시장, 은행 및 주식의 금융적 확장에 쏟아부었습니다.
“수 세기 동안 세계의 가난하고 먼 지역에서 이루어진 수탈과 고통은 북대서양의 부유한 나라들에 ‘소비’를, 즉 쾌락과 질병을 안겨주었다.”
“이게 당신이 유럽에서 설탕을 먹는 데 따른 대가”
이 문제의식을 부각하려 여러 문학과 문헌도 인용합니다.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이 한 사례입니다.
계몽주의 시대는 결국 재앙으로 끝났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은 세계를 뒤흔들었으며 악의 본질을 재평가하도록 내몰았다. 만약 신이 지진을 만들어냈다면 그는 전지전능하지도 선량하지도 않은 셈이다. 생존자 가운데는 볼테르(Voltaire)의 소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Candide, ou l’optimisme)>의 주인공도 들어 있었다. 다정한 성격의 청년 캉디드는 그의 가정교사인 철학자 팡글로스(Pangloss: 비상식적이며 과도한 낙관주의자로 묘사되는 인물一옮긴이)가 자신에게 들려준 말을 모두 곧이듣는다. “사물이 있는 그대로가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없음은 얼마든지 입증 가능하다. ……돌은 깎아서 다듬기 위해, 돼지는 잡아먹히기 위해 존재했다.……개인의 불행은 결국 공공선으로 이어지므로, 그 같은 불행은 심할수록 더 좋다.” 하지만 그래 놓고 그 스승은 매독에 걸리며, 리스본에서 3만 명이 목숨을 잃는 광경을 속절없이 지켜본다. 캉디드는 럼주가 흐르는 황금 분수를 둔 엘도라도로, 이어 네덜란드의 식민지 수리남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설탕 농장에서 맷돌에 으스러져 손을 잃은 흑인 노예를 만난다. 그는 도망치려 애쓰다 다리까지 절단당하고 만다. “이게 당신이 유럽에서 설탕을 먹는 데 따른 대가”라고 그 흑인이 말한다. ‘낙관주의’가 뭐냐고 묻는 그에게 캉디드가 답한다. “모든 것이 잘못일 때도 모든 것이 옳다고 우기는 광기”라고.
이 대목에서 볼테르가 인종차별 발언을 했고, 카리브해 설탕 농장에 간접적 투자를 한 점도 아울러 봐야 할듯합니다.
https://www.historyworkshop.org.uk/anti-racism/crush-the-despicable-voltaires-enlightened-racism/
저자는 프랑스혁명에 참여한 혁명가들은 커피하우스에서 흑인 노예 노동으로 생산한, 설탕 탄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인권을 이야기한 사례도 적었습니다.
팔레루아얄 주변에 세련된 커피하우스가 속속 문을 열었다. 루이 1세는 오스만제국 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처음으로 커피를 맛보았으며 그에게 커피 관목을 선물로 받았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관목에서 얻은 묘목을 마르티니크섬에 심음으로써 커피 플랜테이션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18세기 중반 대서양의 프랑스령 식민지에서는 수백만 그루의 커피 관목이 자라고 있었다. 역사가 쥘 미슐레(Jules Michelet)는 그 섭정 기간에 대해 “파리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카페로 변했다”고 썼다. 실제로 프랑스혁명이 시작된 것은 팔레루아얄 근처의 커피하우스에서 였다. 인권과 시민권에 대해 논의한 혁명가들은 설탕 탄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는데, 설탕·담배·커피 이 모두는 흑인 노예의 노동으로 생산된 것이었다. 라디셰프가 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까지의 여정>(4장 참조)에서는, 두 명의 백인 남성이 멀리 떨어진 러시아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내 친구가 언젠가 말했죠. ‘자네 컵에 담긴 커피와 그 안에 녹아 있는 설탕은 자네와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의 휴식을 박탈한 결과요, 눈물과 신음과 매질과 학대의 원인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게.’ 나는 잔을 든 손이 떨려 커피를 쏟고 말았어요.”
책은 역사책이면서 경제학책입니다. 저자는 경제 이론들을 접목해 원자재 특성을 살핍니다.
예를 들어 은은 “지구의 특정 지점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노동을 투입해 부를 창출하는 국지형 자원”이고, 곡물은 “상당한 토지와 막대한 노동 투자를 요구하는 확산형 자원”입니다. 공간·노동 집약도 차이는 크지만, 화폐 단위로 계산하면 총액은 같을 수 있죠. 그러나!
은은 공기와도 곡물과도 동일하지 않다. 은이 부족하면 부자들이 고통받는다. 곡물이 모자라면 가난한 이들이 고통받는다. 공기가 부족하면 모두가 고통받는다. 환전업자들은 화폐를 마치 보편적 등가물인 양 생각한다. 반면 통치자들은 상품 간의 질적 차이에 의존한다. 서로 다른 천연자원은 상이한 정치적 특성을 띠기 때문이다. 은 세스테르티우스는 악취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꽃향기를 맡듯 가까이 다가가 달러 지폐나 루블화 냄새를 맡는다면, 거기서 훅 끼쳐오는 석유 냄새를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철과 나무, 경제를 엮어냅니다. 광산 옆 제련 용광로에 쓸 숯을 마련하려고 5〜8㎞ 사이 숲을 몽땅 벌목하죠. 나무가 떨어지면 채굴할 광석이 남았더라도 광산은 문을 닫아야 했죠. “아이러니하게도 철기시대의 경제 지형을 좌우한 것은 광석이 아니라 목재였다.”
목재의 경제학과 투자·소비·파괴·부활·증식 되풀이하는 자본주의
유럽 강대국들은 원자재 생산지에 공장이나 조선소를 만듭니다. 피식민지 국가 사람들을 위한 건 당연히 아니었죠.
나무가 없는 네덜란드공화국은 노르웨이와 발트해 연안에서 목재를 수입했으며, 독일 공국에서부터 라인강을 따라 뗏목을 띄웠고 인도네시아 자바섬 에서 희귀종을 조달했다. 잉글랜드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여왕이 백성들에게 모든 연안과 강둑으로부터 14마일(약 22킬로미터 一옮긴이) 이내에서 나무 베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에서 그와 유사한 법 령을 통해 영국의 선례를 따랐다. 포르투갈은 브라질에서, 에스파냐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그리고 무적함대(Armada) 시대에는 발트해 연안에서 목재를 수입했다. 원자재의 경우 흔히 그렇듯이, 운송비가 생산비를 초과했다. 영국 항구에 운송된 목재 가격은 발트해 연안의 숲에서 구입한 가격보다 20배나 더 비쌌다. 18세기에 영국 전투함을 한 척 만드는 데에는 참나무 기둥 4000개, 즉 성숙한 숲 40헥타르가 필요했다. 중상주의적 사고와는 달리 식민지에서 선박을 건조하는 편이 해양을 가로질러 목재를 운송하는 쪽보다 싸게 먹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포르투갈 함대의 거의 절반가량이 브라질에서, 에스파냐 함대의 3분의 1이 쿠바에서, 영국 함대의 대부분이 인도에서 건조되었다.
자본주의에 관한 이야기도 이어집니다. 저자는 자본주의 발전 역사를 ‘상품들의 도움으로 상품들이 생산되는 선형적 과정’으로 보지 않습니다. “세계 경제 조직이 다른 많은 상품을 희생시키면서 단 하나의 상품에 집중하고 그런 다음 뜻하지 않은 또 다른 주도적 상품의 선택이 뒤따르고 또 하나의 혁명적 전환이 이어진, 세계를 뒤흔드는 일련의 선택들”로 보죠.
마르크스는 필립스 이야기에만 나오는 건 아닙니다. 저자는 “투자하고 소비하고 파괴하고 부활하고 다시 증식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자본”에 관한 마르크스의 마지막 공식은 놀라울 정도로 탁월하다고 말하며 인용합니다. “자본가는 …… 살아 있는 노동을 …… 죽은 물질과 결합함으로써 그와 동시에 가치(물질화한 과거의 죽은 노동)를 자본으로, 즉 ‘가치를 품은 큰 가치(value big with value)’로, 마치 몸에 사랑을 품고 있는 것처럼 ‘일’하기 시작하는 살아 있는 괴물로 전환시킨다.”
마르크스가 식민지 약탈을 통한 유럽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설명하면서 한 “국가 경제의 부드러운 연대기에서 목가적 지배는 태곳적부터 존재한다”는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제국 부의 원천은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숨겨져 있다. 그 원천은 노예나 원주민이 채취해 유럽에서 독점 가격에 판매되는 은과 모피, 설탕, 아편 따위의 원자재다.”
저자는 과거 원자재 수탈과 공유지의 비극, 자본주의 폐해 문제를 지금 여기로 이어냅니다. 스마트폰만 해도 100개가 넘는 서로 다른 합금과 플라스틱을 포함합니다. 스마트폰도 인간·동물의 육체적 노력, 석탄이나 천연가스 연소를 거쳐 얻는 에너지가 필요하죠. 저자는 태양광 패널과 풍력 발전소도 고가의 희귀 금속을 비롯한 여러 재료가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우주선에 올라탄 카우보이와 기생 국가
저자는 기후위기의 세계에서 기후재앙을 경고합니다. ‘카우보이 경제’와 ‘우주선 경제’를 예로 들며 이렇게 말합니다.
1974년 윌리엄 노드하우스(William Nordhaus)는 ‘카우보이 경제(cowboy economy)’에서 ‘우주선 경제(spaceship economy)’로의 전환을 예측했다. 카우보이는 자연을 순종적이고 무한한 존재로 여기기에 쓰레기를 얼마나 발생시키든 원하는 만큼 소비한다. 반면 우주비행사는 삶을 지탱하는 데 쓸 수 있는 한정된 자원에 집중하며 자신이 소비한 것을 재활용한다. 그로부터 몇십 년이 지난 2018년, 노드하우스는 이 연구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의 예측은 실현되지 않았다. 인류는 초원에 착륙한 우주비행사라기보다 제 스스로가 우주선에 올라탔음을 발견한 카우보이처럼 굴고 있다. 생육하고 번성한 인류는 노드하우스가 기후재앙의 해로 지목한 2030년에 다가가고 있다. 빙하는 녹아내리고 기온은 큰 폭으로 오르내린다. 여름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덥다. 도끼질을 이기고 살아남은 숲이 산불로 속절없이 파괴된다. 비옥한 땅이 사막으로 변한다. 영구동토층은 습지처럼 질퍽거리고 표면 아래에서 이상한 거품들이 부글거린다. 문화와 자연 사이의 경계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으며, 자연의 영토는 줄어드는 중인데다 바이러스는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튀어나오고 있다.
저자는 ‘기생 국가(parasitic state)’ 개념도 듭니다. “오늘날 의학에서 사용되어 낯익은 단어 ‘기생충(parasite)’의 원래 그리스어 의미는 ‘(무슨 이득을 노리고 유명인이나 주요 행사의)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자(hanger-on)’였다. 이제 이 유용한 단어를 사회과학에 되돌려줄 때다., 기생 국가는 국가의 속성은 유지하되 그 기능을 수행하지는 못하는 정치 공동체다.”
경제학 아니라 생태학, 정치적 선택보다 도덕적 판단을!
저자는 폭력, 경제적 불평등, 자유의 억압뿐만 아니라 생태적 피해도 ‘정치적 악’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고 봅니다. 인간이 생태를 대하는 방식의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누에는 복잡한 생애주기를 거치지만 인류는 그중 누에고치라는 단 한 가지 단계만을 사용한다. 누에고치에서 실을 풀고 나면 인간은 누에가 성장하고 움직이고 번식하는 데 필요한 다른 모든 것을 버린다. 목화 덤불에는 뿌리·줄기·꽃이 있지만, 인간은 오직 씨앗의 껍질에서 자라는 단세포 섬유만 사용한다. 자연이 이 섬유를 만든 것은 씨앗이 바람에 날려 그 식물이 땅 전체에 퍼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인간은 이 작은 필라멘트를 취함으로써 진화가 그들을 위해 구상한 길을 따르지 않았으며, 누에고치나 목화 식물에서 얻은 섬유로 제 몸을 덮어 더위와 추위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법을 익혔다. 양귀비 역시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지만, 인간은 그것의 작은 일부이자 우연적인 부분인 덜 익은 종자 머리에서 분비되는 수액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인간에게 이 모든 자원은 자유의 조건임과 동시에 새로운 의존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인간은 일부 요소는 추출하고 나머지 요소는 저버리는 방법을 다각화함으로써 소비를 늘리고 폐기물을 확산시킨다. 그리고 다른 존재들의 본성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본성까지 변화시킨다.
저자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생태학이 경제학을 대체하고 도덕적 판단이 정치적 선택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생태적 관점에서 볼 때, 유가는 높아야 한다. 고유가는 연료 소비를 억제하고 배출량을 줄여주며 대체 에너지원을 개발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그러나 정치적 관점에서 보자면, 고유가는 권위주의적 석유국가에 재정적 지원을 함으로써 그들에게 전쟁을 일으키고 불평등을 확산하며 배출량을 늘려주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생태학·정치학·경제학은 늘 불화하지만,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조화를 꾀해야 할 때이며, 이 새로운 질서는 분명 생태학이 이끌어가게 될 것이다. 생태학(ecology)과 경제학(economics)은 둘 다 ‘가정(household)’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 대안도 내놓습니다. 육식을 줄이는 것이죠. 저자는 “인류가 육류와 우유를 포기하면 현재 농업이 차지하는 토지의 4분의 3이 해방될 수 있다. 물도 더 많이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축은 전 세계적으로 물의 3분의 1을 소비하고 있다. 게다가 수질 오염의 절반 이상은 가축 탓”이라며 “늘어나는 세계 인구를 먹여 살림과 동시에 탄소배출량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글로벌 노스의 가축 사육을 과감하게(최대 40%까지) 줄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기후위기 판도를 뒤집으려면 육식 포기가 휘발유 포기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거듭 강조하는 말들입니다.
“우리는 석유가 동나기 전에 공기부터 바닥내고 말 것이다.”
“경제적 가치가 없는 공기가 부족해지면 경제적 가치의 구현체인 석유는 팔리지도 연소되지도 않을 것이다. 경제성장을 제한하는 요소는 땅이 아니라 하늘이다.”
“산업 확장을 중단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자원을 고갈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대기를 오염시키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석탄과 석유는 절대 바닥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 한참 전에 우리의 공기가 먼저 결딴날 테니까.”
저자는 책에서 약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을 여러 차례 이야기합니다. “(가이아 가설은) 지구는 바다·대기·지각뿐 아니라 인간 및 기타 생명체들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유기체라는 것이다. 인간이 가이아를 위태롭게 만들 경우, 가이아는 지구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 싶으면 바로 그 인간을 희생시킬 것이다.”
저자 알렉산드르 옛킨트는 중부유럽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로 일합니다. 그는 ‘감사의 글’에 “수년 동안 집필 중인 원고에 대해 십 대 아들들과 계속 논의해왔다. 그 내용이 그들 세대가 직면한 온갖 문제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썼습니다.
책엔 ‘책건문’에 담지 못한 흥미롭고도 유익한, 또 의미 있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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