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감독 놀음…포항에 트로피까지 안긴 ‘기동 매직’
축구에선 ‘감독 놀음’이라는 표현이 종종 나온다.
승패를 가르는 것은 분명 경기를 뛰는 선수 11명의 힘이다. 하지만 이들을 하나로 묶는 지도자의 역량에 따라 결과가 바뀌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한국 축구가 세계 무대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2022 한·일 월드컵의 거스 히딩크가 대표적인 사례다.
올해 프로축구에선 ‘기동매직’이 주목받고 있다. 지난 4일 포항 스틸러스가 대한축구협회(FA)컵 결승전에서 전북 현대를 4-2로 꺾고 10년 만에 정상에 오르는데 김기동 감독의 영향력이 누구보다 컸기 때문이다.
포항은 불리한 여건을 안고 결승전에 나섰다. 백성동과 정재희, 오베르단, 완델손 등 주축 선수들이 다수 다친 상황에서 1일 FA컵 4강전에서 제주 유나이티드와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투를 치렀던 선수들이 고스란히 출전했는데, 같은 경기를 정규시간에 끝내고도 선수를 바꿀 정도로 여유롭던 전북과 비교됐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다. 포항은 전반 17분 전북 송민규에게 선제골을 내주며 0-1로 끌려갔지만 전반 44분 한찬희의 동점골로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후반전 역시 전북 구스타보에게 페널티킥(PK) 득점을 허용했으나 제카와 김종우, 홍윤상의 잇단 득점 릴레이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선수들은 고비마다 흐름을 바꾼 용병술이 적중한 덕이라고 입을 모았다. 전북의 거센 압박에 측면 수비가 흔들리자 좌우 풀백의 위치를 바꾸며 금세 대응했다. 1-2로 끌려가던 후반 11분에는 심상민과 홍윤상을 잇달아 투입하면서 상대의 약점을 찔렀다.
홍윤상은 “감독님이 말한 데로 움직이니 길이 열렸다”고 말했고, 베테랑 수비수 신광훈은 “사실 감독님을 만나기 전에는 선수가 잘해야 승리한다 생각했는데, 포항 축구는 감독 놀음이라는 걸 인정하게 됐다”고 강조했다.
김 감독은 선수들의 찬사에 “주인공은 내가 아닌 선수들”이라며 “선수들이 잘 따라주면서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김 감독의 겸손과 달리 기동 매직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은 시즌 내내 힘을 발휘하는 가성비 경쟁력도 영향을 미쳤다. 프로스포츠에서 투자와 성적이 비례한다는 통념을 뛰어넘는 성적표를 보여주고 있어서다.
프로축구연맹이 2013년부터 10년째 선수 연봉을 발표하고 있는 가운데 2022년 기준 포항의 연봉 순위는 12개팀 가운데 11위. 그런데 올해 성적은 K리그1 2위와 FA컵 우승이다. 몸값이 저렴한 어린 선수를 키우고, 베테랑 선수는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기에 가능했다.
이종하 포항 단장은 “창단 50주년인 올해도 예산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감독이 보여준 힘”이라며 개막 전부터 아쉬움 살림과 한정된 자원 속에 효율성을 극대화한 김 감독의 노고를 인정했다.
김 감독은 “구단은 나를 인정하고, 선수는 나를 믿고 따랐다”면서 “그게 우리를 하나로 묶으면서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었다”고 화답했다.
김 감독은 이제 국내를 넘어 아시아 무대를 바라보고 있다. 아시아챔피언스리그(ACL) 조별리그 3전 전승으로 2년 전 결승전에서 아깝게 놓친 ACL 우승컵에 다시 도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 그는 최근 사우디아라비아 팀들이 오일 머니를 무기로 숱한 스타들을 데려온 것이 부담스럽다면서도 포기하는 법을 모른다. 김 감독은 “조별리그에선 이제 1승만 거두면 16강은 진출할 수 있을 것”이라며 “토너먼트부터는 매 경기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 다시 한번 위를 바라보며 달려가겠다”고 다짐했다.
포항 | 황민국 기자 stylel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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