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멘터리] 한국 영화는 망했다고?
그를 잊고 있었다.
1990년 어느 봄날이었을 것이다. 당시 남산에 있던 영화진흥공사 시사회장에는 당대의 스타 배우인 안성기와 최민수, 그리고 광고 요정으로 인기를 끌며 영화에 데뷔한 최진실 씨가 나타났다. 상영작은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금기시 돼왔던 빨치산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남부군”.
한국 영화계의 큰 주목을 받은 이 영화는 그해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에 이어 흥행 2위에 올랐다. 청룡영화상에서 감독상, 남우주연상(안성기), 남우조연상(최민수), 신인여우상(최진실)을 받는 등 비평적으로도 성공했다. 감독 정지영은 일약 스타 감독이 됐다.
작고한 영화평론가 강한섭 씨는 1990년 여름 한 시사주간지에 이렇게 썼다.
“한국 영화의 영원한 숙제인 리얼리즘과 상업적 성공이라는 두 가지 문제는 그렇게 완성된 작품이 관객들의 호의적 반응으로 직배ㆍ수입영화의 홍수 속에서 우리 영화의 존립에 희망을 줄 수 있는 출구가 될 작품인가 하는 것이다.
정지영 감독이 여전히 현역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올해는 정지영 감독의 데뷔 40주년이다. 최근 서울과 런던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렸다. “플라워 킬링 문”으로 건재를 알린 팔순의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 4살 차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는 5살 차이. 정지영 감독도 “소년들”이라는 제목의 신작을 내놓았다.
1999년 전북 완주에서 벌어졌던 삼례 나라슈퍼 살인강도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수사 기관의 사건 조작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청소년 3명이 16년 만에 재심을 청구해 무죄 확정을 받고 진범이 드러난 이야기가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 “블랙머니”같은 사회파 영화를 만들어온 정 감독의 솜씨로 극화됐다.
솔직히 이 영화가 아주 새롭다거나, 엄청 재미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목소리’가 살아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한국 영화들은 제작비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찍어내는 듯한 느낌이 있다.
“소년들”은 노장 감독의 사회파 영화로서는 약간 과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대중성을 고려했다. 이 영화는 사실 유명한 재심 사건인 ‘약촌오거리 사건’과 ‘나라슈퍼 사건’을 영화적으로 결합시킨 영화다. ‘강철중’을 연상시키며 영화를 끌고 나가는 주인공 설경구의 캐릭터는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을 재수사한 형사로부터 가져왔다.
정 감독 본인도 자신은 켄 로치 같은(영국의 사회파 거장) ‘아티스트’가 아니라 ‘대중영화 감독’일 뿐이라고 말한다. 정 감독은 한국 영화산업 역사에서 가장 투쟁적인 감독 중 한 사람이다. 극장에 뱀을 풀어 사회적 이슈가 됐던 80년대 할리우드 직배 반대 투쟁부터 스크린 쿼터 폐지 반대, 스크린 독과점 해소 운동까지 그는 늘 영화계의 이슈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부딪혀 왔다.
그런 그에게 “소년들” 시사를 한 시간 앞둔 인터뷰에서 한국 영화(산업)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영화는 망했다’는 말까지 나온다. 여름 시장 빅4 중 “밀수”만 그럭저럭 흥행에 성공하더니 추석 시즌 빅3 중에는 손익분기점에 도달한 영화가 아예 없다. 흥행에 실패한 대작 영화들도 이른바 ‘폭망’에 가까운 수준으로, 지난해 여름 시장의 포문을 열었던 “외계+인 1부”의 흥행 대실패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형국이다.
극장에서 만난 한 영화 홍보마케팅사 대표는 아직도 (코로나로) 창고에서 묵히고 있는 영화들이 많은데 다들 눈치만 보고 개봉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으니, 회사 규모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며 진작에 이 업에서 빠져나갔어야 하는데 타이밍을 놓친 것 같다며 농반진반으로 자조 섞인 한탄을 했다.
영화진흥위원회 통계를 보면 9월 한국영화산업의 매출액 653억 원은 팬데믹 이전 3년 같은 달 평균의 53%(관객 수는 45% 수준)에 불과하고, 심지어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해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해 동월에 비해서도 36%나 감소한 수치다.
반면, 세계 영화시장은 연중 최고의 비수기인데다 할리우드 작가· 배우 파업의 영향까지 받았던 9월에도 팬데믹 이전 3년 같은 달 대비 19%의 매출 감소를 기록했을 뿐,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서는 43% 더 나은 실적을 기록했다. (고워스트리트)
또 7월과 8월, 9월까지 합친 3분기 수익은 처음으로 팬데믹 이전 실적을 3% 넘어서면서 지난 10년래 가장 높은 수익을 기록한 분기로 기록됐다. 이처럼 세계 영화시장은 팬데믹에서 완전히 회복한 듯이 보이는데, 한국 영화(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동안 한국 영화의 위기론에는 다양한 이유들이 거론돼왔다. 코로나로 인한 극장 직격탄, 스트리밍 서비스의 극장 관람 대체, 급격한 관람료 인상, 창고 영화의 방출로 인한 트렌드 반영 실패 등등 다양한 이유였다. 그런데 이런 이유는 모두 한국 영화에만 해당되는 사안은 아니다.
추석 시즌의 실패를 겪으면서 한국 영화의 위기가 더이상 ‘론’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게 확실해지자, 위기의 원인은 이제 밖이 아니라 안으로, 한국 영화 그 자체로 향하고 있다. 쉽게 말해 관객들이 극장을 찾아가서 볼만한 한국 영화가 없다는 것이다.
- 상당히 어려운 처지에 놓인 한국영화, 한국영화산업의 현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 많은 사람들이 지금이 한국 영화 위기라고 그러잖아요. 왜? 손님이 안 드니까. 코로나 이후 한국 영화 성적이 상당히 저조해요. 극장 요금 오른 것과 코로나를 겪으면서 극장 문화에 익숙해지지 않은 것 때문이라고들 얘기를 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관객이 재미있고 즐겁게 볼 수 있는 그런 영화들이 없었던 모양이라고 봐요.
물론 꼭 재미있고 즐거워야만 좋은 영화는 아니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좋은 영화를 만들 게 하는 좋은 관객들이 틀림없이 있으니까 그걸 믿고 우리는 계속 좋은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해야 되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많은 관객과 영화를 나누기 위해 극적 장치를 만든다”는 노 감독은 슬쩍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간다. 단, 극장에서 볼만한, 또는 극장에서 (빨리) 보고 싶은 영화일 경우에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475만)”, “스즈메의 문단속(555만)”, “엘리멘탈(723만)”, “밀수(514만)” “오펜하이머(322만)” 등을 보기 위해 관객들은 여전히 극장을 찾았다. 그럼 올해 흥행 1위이자 유일한 천만영화인 “범죄 도시3”가 '극장에서 볼만한' 영화냐고 묻는다면 답변이 궁색한 건 사실인데, 그건 프랜차이즈 영화가 불러온 영화 외적 신드롬에도 힘입었다고 해두자. (모든 것을 다 설명하는 이론이 어디 있는가? 물리학도 거시세계는 고전물리학, 미시세계는 양자역학으로 설명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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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논설위원 joole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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