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층 결집 없었던 ‘이념 전쟁’…한반도 평화 패러다임 상상을
이념의 종언
지난 서울 강서구청장 선거는 더불어민주당의 낙승으로 끝났다. 여당과 야당이 총력전을 펼친 구청장 선거는 사실상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이었다.
아무리 여당의 공천 과정을 거쳤다고 해도 윤 대통령이 보궐선거의 원인을 제공한 김태우 전 구청장을 8·15 광복절 특사로 사면하는 순간, 이 선거의 성격은 명확해졌다. 그만큼 강서구청장 선거 결과인 17.15%포인트 차이는 윤 대통령에게는 뼈아프다. 내년 총선의 전망이 어둡다는 것 외에도 윤석열 정부의 정책 기조에 상당수가 경고장을 던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여당에서는 혁신위원회가 구성되고, 윤 대통령도 “국민이 늘 무조건 옳다”며 민심을 수습하려 안간힘을 쓴다. 최근 윤 대통령의 언설에서 경제와 국민에 대한 강조가 도드라진 것도 이러한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북한 문제’ 해결 의지도 사르르
사실 집권 초기만 하더라도 한국 사회 대다수는 윤 대통령이 이토록 ‘이념’을 강조할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 검찰총장이라는 배경 탓에 검찰 권력을 적극 활용할 것이라는 우려는 있었지만, 그의 입에서 “이념이 가장 중요”(8월28일 국민의힘 연찬회)하다는 말이 나올 것으로 생각한 이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이념으로 유권자를 갈라치기 하는 순간 중도층의 표심을 잃게 된다는 사실이 상식이 된 지 오래된 터라 대통령의 행보를 둘러싸고 온갖 해석이 난무했다.
뉴라이트와 극우주의자들에게 둘러싸였다는 평가부터 강성 지지층만으로도 충분히 국정운영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이 배경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행보로 볼 때 윤 대통령의 이념 강조는 한국 사회에 대한 무지로 인한 패착에 가깝다. 취임식 이래로 지속적으로 외쳐댄 ‘자유’에 대한 굳은 신념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냉전으로 치닫는 국제 정세를 예민하게 읽어낸 대안은 더더욱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저 윤 대통령은 ‘빨갱이 척결’이라는 깃발을 드는 것만으로도 중도층을 포함한 과반이 자신을 지지할 것으로 오판했던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이념 전쟁은 전방위적으로 이뤄졌다. 예컨대 집권 초반부터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을 담당했던 이들을 줄줄이 기소했고, 4·27 남북정상회담과 9·19 군사합의 등을 ‘가짜 평화’로 폄하했다. 군부독재 시대에나 등장할 법한 간첩단 사건이 등장하고, 민주노총 관련자가 북한으로부터 지령을 받았다는 수사 결과도 나왔다. 하지만 연이어 등장한 ‘종북 사건’에 남한 사회는 놀랄 만큼 평정심을 유지했다. 아무리 북한 관련 이슈가 등장해도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30% 안팎에 머물렀다. 북한 핵무기가 초래한 위기를 강조하면서 온갖 군사훈련과 심지어 도심 군사 퍼레이드를 해대도 한국 사회의 반응은 차분했다. 이는 적어도 이념 전쟁이 무차별적으로 확산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회 내부의 의지도 사그라졌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과거에는 북한 이슈가 유권자의 표심을 요동치게 하던 시절이 있었다. 오죽하면 1997년 대선 국면에서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서 북한 쪽에 무력시위를 요청한 총풍 사건이 일어났을까. 지금 국가안보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도 이명박 정부의 위기 돌파를 위해 북한과 접촉해 돈봉투를 전달하려 했다는 증언이 나와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그만큼 북한이 국내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은 보수와 진보 정부를 막론하고 상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변화는 아래로부터 조용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정치인들은 여전히 북한 문제가 표가 된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시민들은 그것만으로 정부를 혹은 특정 정치 세력을 지지하지 않는다. 경제력과 군사력 모두에서 절대적 우위를 점하게 된 남한 사회는 북한을 더는 ‘진짜’ 위협으로 감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 발전과 문화적 역량 등이 강화되면서 남한은 잘사는 서구 사회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시작했고, 북한을 가난하고 후진적인 타자로 무시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윤 대통령이 남한 내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이 있다는 경고를 되풀이하자 대다수는 그가 현실과 괴리된 구시대적인 상황 인식에 머물러 있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물론 군사안보라는 측면에서 핵무기를 가진 북한은 여전히 파괴력 있는 존재임이 분명하지만, 대다수의 시민들은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설혹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남한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날 것을 알고 있다.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이 아무리 한반도 전쟁 위기를 경고해도 한국 사회가 차분한 이유는 어차피 온갖 기술력과 자본, 거기에 군사력과 한-미 동맹까지 이중·삼중의 안전판을 마련해놓은 남한이 북한을 압도할 것을 귀신같이 눈치채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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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 이미 ‘다른 나라’ 단계로
예상컨대 적어도 윤 대통령이 다음 총선까지는 이념이나 ‘공산 전체주의’ 세력을 운운하는 일은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다.잘못하면 레임덕에 빠질 수 있기에 어떻게든 변화를 보여줄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부 부처 곳곳에 이식된 이념 전쟁이라는 프레임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가짜 평화’가 아닌 ‘진짜 평화’를 하겠다며 남북 교류협력을 사실상 포기한 통일부는 유명무실한 상태에 빠질 확률이 높다.
애초에 ‘교류협력’ 없이 ‘대북 압박’ 기능만으로 통일부로 개편한 것 자체가 스스로 존재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통일부가 공을 들이는 북한 인권도 사회적 공명을 만들어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엮이고 싶지 않은 타자로 북한을 감각하기 시작한 대다수가 갑작스레 북한 인권에 관심을 기울일 가능성은 높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념 전쟁에 선봉에 나섰던 통일부는 치명상을 입을 가능성이 크고, 기존의 분단·평화·통일 개념 전반의 급속한 붕괴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곧 목도하게 될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관건은 이념 이후, 그리고 붕괴 이후의 한반도 평화 패러다임을 상상하는 것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대사처럼 단순히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안이한 사고는 금물이다. 이미 심리적 수준에서 다른 국가로 전환된 남북관계의 현실과 세계적으로 요동치는 안보 상황을 지금이라도 직시해야 한다. 기존의 관습적 사고를 벗어나 전복적인 질문이 필요한 이유다.
참, 진보 진영도 과연 이념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웠는지에 대한 질문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념의 종언은 결국 북한을 두고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어온 진보와 보수 정치 세력 전반의 위기를 뜻하기 때문이다.
김성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이명박 정부 시절 북한에 돈봉투를 전달하려 했다는 의혹에 대해 “북한의 일방적 주장에 불과해 이에 관한 객관적 증언이 나온 바 없으며, 이런 북한의 주장을 이명박 정부가 공식 부인한 바 있다”고 밝혀왔습니다.)
영국 에식스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성공회대, 싱가포르국립대를 거쳐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북한 사회와 탈분단 문화를 연구하며, ‘갈라진 마음들’ 등 다수 학술 논문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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