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곳적부터 인류는 굳건히 이런 믿음을 가져왔지요. 남성과 여성이 만나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건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반골이 존재해왔습니다. 주어진 성별대로 살지 않겠다고 외친 자들 역시 오랜 시간 투쟁해 왔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 남자가 되고 싶은 여자, 혹은 중간의 회색지대 어딘가로 들어가기를 소망한 사람들이 있었지요. 오늘날의 언어로는 트랜스젠더로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녹록지 않은 삶이었습니다. 공동체에 의해 조리돌림 당하고, 집단적으로 돌팔매를 맞거나, 때로는 살해당하기도 했습니다. 19세기 인권 의식이 비로소 싹을 틔웠으나, 트랜스젠더는 예외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범주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역사 속에서 늘 소박맞은 건 아니었습니다. 성 정체성이 모호한 사람들이 외려 융숭한 대접을 받던 시기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트랜스젠더의 역사를 살펴봅니다. 최근 우리 사회를 뒤흔든 사기 사건 때문에 모든 트랜스젠더들이 돌팔매질 당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트랜스젠더는 귀한 몸이시다…고대 그리스의 속사정
고대 그리스에서는 거세하고, 여성 옷을 입으며 여성처럼 행동하는 ‘남성’들이 있었습니다. 저잣거리 시정잡배들이 아니었지요. 이들은 그리스 사회에서 꽤 존경받는 사제들이었습니다.
그리스의 사제들이 ‘트렌스젠더’가 된 이유는 이들이 모신 신들의 정체 때문입니다. 이들이 모신 신의 이름은 키벨레와 아티스. 고대 튀르키예 동부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시작해 고대 그리스·로마에까지 전파된 유명한 신들이지요. 우리가 좋아하는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에도 등장할 정도였으니까요. 이들의 이야기를 잠시 들여다보시지요.
여신 키벨레는 제우스의 딸입니다. (여러 설이 혼재하지만)제우스가 몽정을 통해 낳은 자식입니다. 그래서인지 키벨레는 태어났을 때 남성성과 여성성을 둘 다 지니고 있었습니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이를 악마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그가 스스로 거세하도록 음모를 꾸몄고, 이에 성공하지요.
“싹둑”. 거세된 성기가 땅에 떨어졌을 때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성기가 닿은 땅에서 아몬드 나무가 자라난 것이었습니다. 당대 시민들의 젖줄이었던 상가리우스강의 딸 나나가 이 아몬드를 품었습니다. 그리고 나나의 배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합니다. 회임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태어난 사람이 아티스라는 미모의 남성이었지요.
여기서부터 막장으로 치닫습니다. 키벨레가 아티스를 보고 반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엄마(혹은 아빠?)가 자기 아들을 이성으로서 사랑하고 만 것이지요. 아티스가 이웃나라 왕의 딸과 장가를 가려고 하자, 키벨레가 이를 막아섭니다. 결국 정신착란을 일으킨 아티스는 자기를 거세하고 맙니다. 대를 이은 성기 절단. 미남자 아티스의 최후였습니다.
최고의 인기 신들은 거세를 했다
비극이 얽히고설킨 탓이었을까요. 키벨레와 아티스는 고대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가장 인기 많은 신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신화가 고대 그리스까지 닿은 배경입니다. 두신 모두 ‘거세’와 연관돼 있으니, 이들을 모시는 사제들 역시 거세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던 것이지요.
기원전 2세기 고대 로마에서 키벨레의 인기는 다른 신들을 압도할 정도였습니다. 다종교 국가인 로마에서 ‘마그나 마르테’(위대한 어머니)라고 불릴 정도였으니까요. 포에니 전쟁으로 위기에 처한 당시 고대 로마의 상황도 그녀의 인기를 올리는 배경이 됐습니다. 마침 이 신을 모신 뒤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으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지요.
고대에서 트렌스젠더는 신기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스키타이에서도 거세한 중성 남성 사제들 에나리가 있었지요. 이들 역시 고대 그리스 사제들처럼 여성의 옷을 입고 여성처럼 말했습니다. 이들이 모시는 아리스탐파사가 중성의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장 강력한 샤먼 사제로 통했고 스키타이 사회에서 특별한 존경을 받았습니다.
트랜스젠더 신들이 존경받은 이유가 있습니다. 양성을 동시에 지녔다는 건 다산과 주로 연결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농경이 경제생활의 전부였던 당시에는 노동력이 중요한 자원이었고, 다산은 부와 직결되는 요소였지요. 양성을 지닌 신은 그만큼 고대의 시민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도 트랜스젠더는 인정받은 존재였다
다신교 시대가 저물고, 유일신 종교가 자리잡습니다. 기독교의, 기독교에 의한, 기독교를 위한 지배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성전환자의 위상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기독교가 공인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지요. 종교는 때론 그들을 인정하고, 이따금 성인 반열에 올려놓기도 했습니다. 성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가 어떤 배경으로 트랜스젠더들을 받아들인 것이었을까요.
트랜스젠더의 삶을 선택한 수많은 기독교인의 신실한 믿음과 헌신 덕분이었습니다. 6세기 비잔틴 제국의 귀족 여성 아나스타샤는 안락한 삶을 버리고 이집트에서 수도사로의 삶을 살아갑니다.
당시 수도사는 남자만 가능한 일이었기에, 그녀는 남자 수도사 복장을 하고 남성 행세를 하면서 평생을 살아갔지요.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트랜스젠더는 반드시 성전환 수술을 한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거친 음식을 먹고, 불편한 잠자리에서 자야 하는 삶이었지만, 그녀는 신을 모실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을 느꼈습니다. 자기 삶이 다한 이후에 그녀가 동방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될 수 있는 배경이었습니다.
성인이 된 트랜스젠더들
중세에는 수 많은 여성들이 더 가까운 거리에서 신을 모시고자 남성행세를 했습니다. 마리나라는 여성도 아버지를 설득해 수도원에 들어간 경우였습니다. 그녀는 이웃의 밀고에 의해 마을 처녀를 임신(?)시켰다는 모함을 듣고 파문당하기에 이르렀지요.
마리나는 진실을 밝히지 않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대신 그 처녀의 아이를 자신이 직접 키웠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군인이었만 그는 끝까지 비밀을 지켰습니다.) 그 아이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죽은 후, 모든 진실이 밝혀집니다. 사실은 그가 여자였고, 처녀를 임신시킬 수 없는 몸이었다는 사실을요.
성별을 속였지만, 오늘날 추문((I‘m 신뢰에요)과는 정반대의 미담이었습니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양쪽에서 마리나가 성인으로 추대된 배경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잘 모시고자 했던 트랜스젠더들의 활약 덕분이었을까요. 중세 교회에서 성전환자는 저주가 아닌, 하나님의 표현으로 해석되기에 이르렀지요. 때로는 신의 특별한 축복으로 여겨지기도 했었지요.
실제로 14세기 프랑스 소설 중 하나인 ’샹송 드 제스테‘에는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을 하는 남성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천사로부터 고환과 성기를 선물 받지요. 마치 신의 축복인 것처럼 말입니다. 중세 시대 사람들이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얼마나 관대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미국의 유명 사학자인 캐롤라인 워커 바이넘 교수 역시 중세 유럽인들이 성전환에 관대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는 “중세 시대 사람들은 ‘어머니 예수’라는 개념을 사용했다”면서 “이는 예수를 남성과 여성 중간적 존재로 여겼던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내놓기도 했었지요.
근대는 진보가 아닌 퇴보였다...트랜스젠더에게 있어서
19세기는 눈부신 경제성장과 인권 의식이 싹을 틔운 시기로 기록됩니다. 하지만 오히려 트랜스젠더들에게는 고통의 시작이었지요. 중세 말부터 이어져 내려온 혐오의 정서가 19세기부터 폭발했기 때문입니다. 영국이 트랜스젠더를 법적으로 처벌하는 조항을 만든 때 역시 1885년이었지요.
세계 최강대국 미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19세기 중반부터 여자 옷을 입은 남성들을 처벌하는 조항이 전국적으로 만들어졌었지요. 악명높은 ’3조법‘(the three-piece law)이었습니다.
여전히 수 많은 트랜스젠더 여성들이 혐오자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11월 20일이 국제트렌스젠더 추모의 날로 지정됩니다. 두 트랜스젠더 여성이 11월 같은 달에 잔혹하게 살해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관용과 다양성의 시대에도 여전히 그들은 척박한 삶을 살아갑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트랜스젠더들이 일궈낸 역사적 진보가 있음을요. 의학적 성취로 수만 명의 목숨을 구한 주인공인 앨런 하트 역시 트랜스젠더였습니다. 트랜스젠더가 인류에 공헌한 사례를 차례차례 소개하겠습니다(next time...)오점으로 가득한 사기꾼이 한 사람이 집단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네줄요약>
ㅇ거세 후 여성 옷을 입은 트랜스젠더는 고대부터 존재했다.
ㅇ이들은 대개 중성적 신을 모시는 사제들로서 사회의 존경을 받았다.
ㅇ기독교에서도 수도승이 되기위해 남장을 한 여성들이 시성되기도 했다.
ㅇ트랜스젠더는 중세 말기에서부터 조직적으로 처벌받기 시작해 근대에 극에 달했다.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가끔은 ‘낚시성 제목’으로 알찬 지식을 전달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매주 토요일 알롱달롱한 역사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