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펌 3040 넥스트리더]⑤ “공정위 사건은 스티브잡스처럼” 6대 제강사 사로잡은 태평양 변호사
“발주업체, 유통업체라고 다 甲 아니야”
‘남다른 피티’로 현재 6대 제강사 대리
기업의 사업 성패는 3040 세대가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년 안팎의 경력을 토대로 사내 주요 업무를 견인하면서 전문성을 갈고 닦아 조직의 허리 역할을 하는 게 바로 3040 세대다. 국내 주요 로펌 역시 예외는 아니다. 선배들이 발굴하지 않은 전문 분야를 찾아내 탁월한 성과를 이루며 차세대 리더로 발돋움하는 3040세대 변호사들이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로펌의 현재와 미래를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공공기관 A가 건설업체 B에 공사를 발주했다면 우월한 지위에 있는 것은 A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갑을(甲乙) 관계를 결정하는 요인은 복합적이다. A의 연 매출은 2조원이고 전체 시장의 1%를 발주하는 반면, B의 매출은 10조원 이상에 공사 10%를 수주하는 대기업이다. 서로 간 계약에 대한 매출 의존도 B에 비해 A가 훨씬 높다.
서울고등법원이 지난 2016년 9월 경기도시공사가 건설업체들에 거래상 우월적 지위가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것도 이런 논리를 받아들여서다. 공사가 갑의 위치에 있다는 공정거래위원회 판단을 뒤집은 것이다. 도시공사는 건설 계약을 맺은 9개 업체에 추가 공사 비용을 낮게 책정해 문제가 됐었다. 공정위는 이를 거래상 지위 남용 행위로 보고 과징금 처분을 했고, 도시공사는 이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냈다.
경기도시공사를 대리해 승소를 이끌어 낸 박성진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사법연수원 39기)는 “갑이 누구인지를 판단하려면 계약 자체만을 놓고 보기보다 서로에 대한 거래의존도, 이들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시장 상황 등이 고려돼야 함을 주장했다”고 했다. 재판부도 “거래 상대방인 건설업체가 원고(경기도시공사)에 비해 전체적 사업 능력이 우월하고 거래 상대방을 바꿀 충분한 기회가 있으며, 실제 원고에 대한 거래의존도도 낮아 원고에게 거래상 지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1년차 공정거래 전문 변호사인 박 변호사는 법조계 안팎에서 ‘피티(PT)의 달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복잡한 공정 거래 사건을 한 눈에 이해하기 쉬운 그래픽으로 도식화 하고 풀어서 설명한다. 애플 신제품을 직접 발표하며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던 스티브 잡스를 롤모델로 삼고 연습한 결과다. 현재 그는 주요 제강사 7개 중 6곳을 대리하고 있다. 지난해 그가 한 제강사를 대리해 PT를 한 모습을 본 다른 제강사들도 그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맡기면서다.
◇ 갑(甲)을 판단할 때는… “‘외부 옵션’도 고려해야”
박 변호사는 태평양 공정거래 그룹에서 기업을 대리해 공정위 조사에 대응하고, 공정거래법 위반 사건 소송을 진행하는 역할을 한다. 공정위 조사 이전에 공정위 소관 법령에 관한 자문도 하고 있다.
경기도시공사 사건 이후 애플코리아 등 여러 기업의 거래상 지위 남용 행위 관련 사건을 맡아온 박 변호사는 나름의 판단 기준을 제시했다. ‘외부 옵션’에 따라서 누가 갑인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래 상대방이 ‘나’ 말고도 여러 선택지가 있는 상황에서 ‘나’를 골랐다면, 내가 우월해서가 아니라 나를 고르는 게 이득인 탓이다. 이 경우 오로지 본인의 득실에 따라 ‘나’를 고른 상대방이 을(乙)이 될 리는 없다. 박 변호사는 공정위도 이런 식의 판단을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는 유통법에도 적용된다. 현행 대규모유통업법은 ‘유통업체는 갑, 납품업체는 을’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에 박 변호사는 “기업 규모나 외부 옵션, 거래 상황 등을 고려했을 때 납품업자가 명백히 갑인 경우에도 ‘유통업자가 갑’이라는 기준 때문에 유통업자가 피해를 보기도 한다”며 “현실에 맞게 개별 사건마다 규제에 대한 판단 기준을 달리 할 수 있도록 관련 고시라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우리 사건도”…남다른 ‘피티’에 제강사 러브콜 잇따라
박 변호사는 작년 ‘관수철근 입찰 담합 사건’에 대한 공정위 심의가 열릴 때 본인의 장기인 피티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이 사건은 공정위가 국내 제강사 7곳이 철근 입찰 담합에 가담했다고 봐 검찰에 고발한 사건이다. 공정위는 제강사들이 조달청이 정기 발주한 철근 연간 단가 계약 입찰에서 미리 낙찰 물량을 배분하고 투찰가격을 합의했다고 한다.
당시 박 변호사는 환영철강공업을 대리해 공정위 심사보고서에 대한 기업 측 의견을 발표했다. 그는 관수철근 시장은 애초에 경쟁 유인이 없는 시장이라는 점을 그래픽으로 설명했다. 낙찰자가 여러 명이므로 물량 확보 경쟁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간단한 그림으로 도식화했다. 그는 조달청의 ‘최저가 입찰제’를 지적할 때도 그림을 사용했다. 가장 낮은 가격으로 써내야만 낙찰이 되는 입찰제도 자체가 일종의 ‘갑질’이라는 점을 보기 쉽게 설명했다.
심의가 끝난 후 자리에 있던 제강사 임직원들은 그의 피티를 칭찬했다. 이후 제강사 6곳은 태평양에 이번 사건 손해배상 소송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박 변호사가 주도해 준비한 ‘관수철근 입찰 담합 효과에 대한 경제분석’ 보고서는 제강사 7곳 모두 형사 재판에서 적극 활용했다.
박 변호사는 “한때 롤모델을 스티브잡스로 삼을 정도로 피티 공부를 했다”며 “공정거래 심의에서 변호사 피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만큼, 어떤 피티가 청자를 설득할 수 있을지 오랜 시간 고민했다”고 전했다. 이어 “복잡한 사건을 설명해야 할 때는 피티에 실을 영상 제작을 외부에 맡기기도 한다”며 “짧은 시간에 사건을 쉽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공정거래 변호사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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