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는 도시 전설 같은 거야, 써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

한겨레21 2023. 11. 5.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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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성 청년 방송 비정규직이다]⑥ 색보정 어시스턴트편
계속 일하고 싶기에 짧게 일하고 그만둔 회사, 방송 현장의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선택’으로 감추는 도제식 인력 양성
지수씨는 친구들의 조언대로 출퇴근 시간을 앱으로 기록해뒀다. 앱에는 그날의 기분과 상황을 표현하는 사진도 첨부했다. 지수 제공

“퇴사할 때 고민이 많았어요. 너무 짧게 일했으니까요. 내가 좀더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괜찮다고 생각하면 버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갈등이 많았죠. 빨리 포기했다는 마음의 짐이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계속 방송일을 할 거니까요.”

지수(가명)씨는 대학 졸업 뒤 입사한 색보정 회사에서 4개월을 일했다. 매일 보상 없이 이어지는 야근, 사수의 가스라이팅과 괴롭힘. 두 가지 상황 속에서 ‘그래도 버텨야 한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조금 더 길게 보고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을 선택했다. 짧았던 4개월간의 첫 직장 이야기, 방송일이 하고 싶어 다시 대학에 들어가 공부해 택한 이 일에 대한 소회를 들려줬다.

카톡방에서 일부러 몇시에 퇴근하는지 물어본 친구들

드라마 촬영을 마치면 후반작업이 이어지는데 편집, 컴퓨터그래픽(CG), 색보정, 음향의 과정을 거친다. 드라마의 색감이 ‘영화 같다’고 말할 때 그 역할을 하는 게 색보정이다. 스토리와 시공간의 특성에 맞춰 영상의 명암, 채도, 색상 등을 조정해 장르의 전체적인 톤을 결정한다.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스릴러가 될 수도 있고 로맨스가 될 수도 있어, 그게 굉장히 재밌는 거 같아요.”

영화과에서 후반작업·색보정을 공부한 지수씨는 구직 사이트에서 채용공고를 보고 입사해 ‘어시스턴트’로 일했다. 어시스턴트는 ‘메인’의 일을 보조하는데, 지수씨의 회사는 어시스턴트 2명이 메인 선배 5명을 도왔다.

지수씨가 쓴 근로계약서에는 오전 10시 출근 저녁 7시 퇴근, 연차 유급휴가는 근로기준법에 정하는 바에 따라 부여한다고 돼 있었다. 하지만 지수씨가 실제 저녁 7시에 퇴근한 날은 손에 꼽았다. 밤 9시, 자정, 새벽 2시, 때로는 철야해 새벽 5시에 퇴근하기도 했지만 시간외수당은 전혀 없었다. 포괄임금제로 매달 지수씨 통장에 찍힌 금액은 170만~180만원 정도였다. “후반작업 쪽 대부분이 포괄임금제로 계약해서 시간외수당을 받는 경우가 없는 것 같아요.”

선배에게 연차를 사용할 수 있냐고 물으니 연차는 도시 전설 같은 거라고, 써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본인이 필요할 때 쉬는 게 아니라 메인에게 시킬 일이 있는지 물어보고 없다고 하면 쉴 수 있었다. 지수씨 친구들은 매일 야근하는 지수씨에게 출퇴근 시간을 기록해두라 조언했고, 지수씨는 앱을 이용해 그날의 기분을 담은 사진과 퇴근 시간을 적어뒀다.

“친구들이 제가 일하는 걸 보고 엄청 마음을 졸였더라고요. 과로사 할까봐 무서웠대요. 그래서 일부러 카톡방에서 퇴근했는지, 몇 시에 했는지 물어본 거래요. 나중에 노동청 신고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요. 하지만 저는 계속 방송 쪽에서 일할 거라 신고도 못해요.”

인맥으로 연결됐고, 알음알음 일을 구해야 하는, 좁은 방송판에서 평판은 중요하다. 정당한 문제제기를 해도 찍혀서 일을 못하게 되는 이곳에서 지수씨는 ‘계속 일하고 싶어서’ 노동청 신고를 포기했다.

색보정은 드라마의 전체적인 톤과 색감을 결정한다. 색보정 작업 전후 모습. 지수씨 제공

“또 곡해해서 듣겠지…”라는 사수

부당하지만 좋아하는 일이고 하다보니 적응은 돼서 할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지수씨를 더 힘들게 한 것은 차별적인 조직 내 분위기와 가스라이팅이라 할 수 있는 사수의 말과 행동이었다.

“회사 특성상 야근이 잦으니 별일 없는 날엔 ‘칼퇴’하려 노력했는데, 일 없는 날에는 회사에 남아 개인 공부를 하고 가라 했어요. 또, 보통 퇴근할 때 사수에게 시킬 일 없는지 물어보고 다른 분들에게 인사하고 퇴근해야 했는데, 사수가 말없이 자리를 비워 기다려야 하는 일이 많았어요. 전화나 문자를 해도 보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요. 촬영 용어나 프로그램 관련해서 모르는 용어가 나오면 ‘이걸 왜 모르냐, 영화과 나온 거 맞냐, 영화과에서 이런 거 안 알려주냐, 어디 가서 영화과 나왔다는 말 하지 마라’는 말을 쏟아냈어요.”

50대 후반 남성인 사수의 말과 행동은 지수씨를 힘들게 했고, 그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고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앞에서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웠다. 한두 번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었지만 사수는 자기 말을 지수씨가 잘 못 알아들었다며 이후에는 “또 곡해해서 듣겠지…”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어느 날은 다른 어시스턴트와 밖에서 밥을 먹는데, 선배한테 전화가 왔어요. 손님 미팅을 하는데 들어와서 커피를 타라는 거예요. 그런 이유로 밖에 있는 저를 부른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지만 급하게 밥을 먹고 들어갔어요. 어시스턴트를 여자로 뽑는 이유가 이것인가라고 생각했어요.”

지수씨가 업무에 대한 의견을 냈을 때는 “평소 시키는 일은 못하면서 이런 거는 생각이 있네?”라고 말했고, 퇴사를 알렸을 때는 “네가 이 업계에서 계속 일할 거면 잘 생각해라. 네가 다른 회사에 지원할 때 원서 넣으면 어차피 다 전화가 온다. 그때 내가 뭐라 말할 거 같냐”고 했다.

‘어시스턴트’로 수년 일하면 ‘메인’이 된다. 메인이 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상황에 따라, 회사에 따라 다르다. 초기에는 적은 임금과 열악한 상황에서 일하지만, 그것을 버텨내면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도제식 인력 양성은 드라마 현장에 많이 남아 있다. 고통을 감내하면 좋은 날이 오리라는 희망은 때로 방송 현장의 구조적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한다. 방송을 펑크 내지 않기 위해 야근과 밤샘 작업을 밥 먹듯이 해도 제대로 된 보상은 주어지지 않고, 원래 그렇다는 이유로 모든 상황이 정당화된다. 그렇게 부당한 모든 일이 개인의 선택이 된다.

매순간 자신을 지키며 일할 수 있기를

지수씨가 일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낀 순간은 드라마 엔딩크레디트에 본인 이름이 나올 때였다. “엔딩크레디트를 보면 힘들었지만 별 탈 없이 끝냈다, 그래도 내가 한 발자국 내디뎠다, 그런 기분이 들어서 좋아요.”

가혹한 세계 속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질책하는 시간을 보냈던 지수씨가 앞으로는 좋은 경험 많이 하기를, 원하는 색보정 일을 계속하면서도 매 순간 자신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란다.

진재연 엔딩크레딧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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